인문학에 빠진 사람들 문탁네트워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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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 하기 힘든 학문’으로 여겨지던 인문학이 재조명되고 있다. 삶을 돌아보고 마음의 풍요를 얻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늘면서 ‘마을에서 만나는 인문학’을 표방하는 이들도 등장했다. 바로 문탁네트워크다.

함께 ‘묻고 연마하는’ 모임

지난 13일 오전 10시. 문탁네트워크(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의 강의실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였다. 매주 화요일 열리는 세미나 ‘앎과 삶’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모인 사람은 30~50대 주부 12명. 튜터(개인지도교사) 이희경(49·수지구 동천동)씨의 진행으로 세미나가 시작됐다. 소설 『벤야멘타 하인학교』에 대해 참가자 전원이 써온 에세이를 발표하고 토론을 했다. “교육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 교육을 받은 사람” “나와 소설 속 인물이 얼마나 다른가”등 자기 반성과 소감,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이어졌다.

문탁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은 지난해 9월이다. 이씨를 중심으로 알고 지내던 9명이 “함께 공부를 해보자”고 뭉친 게 계기였다. 초기 멤버인 김혜영(49·수지구 풍덕천동)씨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비전을 나누기 위해선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이씨 집에 모여 작가 일리히의 작품을 읽었다. 모임명은 이씨가 사주명리학 스승에게 받아 닉네임으로 쓰고 있는 `문탁(問琢·묻고 연마한다)`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올해 1월, 문탁 회원들은 동천동에 165.3m(50평) 공간을 마련했다. 월세는 회원 9명이 회비(한 달에 1인당 10만~30만원)를 모아 충당했다.

세미나나 강좌가 열리는 강의실, 공부방, 카페, 함께 식사하는 공간으로 꾸몄다. 쓰지 않은 가구와 전기용품을 기증하고 버려진 물건을 모아 살림을 장만했다. “처음에는 월세를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는 이씨는 “함께여서 가능했던 것 같다”며 웃었다.

공간을 얻은 후 세미나와 강좌를 속속 개설됐다. 첫 프로그램이었던 논어강좌는 정원 35명이 일주일 만에 마감됐다. 현재 마을에서 국경넘기, 의역학 강좌, 논어강좌, 가족연구 세미나, 앎과 삶 세미나, 불교세미나 등의 강좌나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공동체

문탁네트워크는 공부를 하면서 함께 밥을 먹고 친구를 사귀기도 하는 공동체다. 이씨는 “문탁네트워크는 친구와 함께 삶의 비전을 찾는 작고 단단한 공동체”라며 “친구와 비전이 있으면 좋은 삶을 살 수 있고, 삶의 비전은 인문학 공부를 통해서 찾게 된다”고 설명했다. 인문학이야말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찾아내 실천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공부를 통해 ‘나의 성장’을 꿈꾸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는다. 김씨는 “문탁네트워크에서 만나 ‘함께, 같이’를 고민하면서 서로에게 선물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귀띔했다.

주방은 이 모임의 공동체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소다. 입구의 화이트보드에는 이달 주방에서 받은 선물이 빼곡히 적혀 있다. 살림지기가 있지만 운영자, 수강생 누구나 식사 준비를 한다. 설거지도 먹은 사람의 몫이다.

앞으로도 마을 친구들과 같이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세미나 페스티벌과 학술축제를 열고 일년 후에는 마을 인터넷 방송국을 만들어 보다 많은 사람들과 인문학 이야기를 나눌 계획이다.

이씨는 “문탁네트워크의 세미나, 강좌는 고등학생 이상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며 “공부를 통해 앎과 삶이 일치해 갈 것을 꿈꾼다”고 말했다.

<신수연 기자 ss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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