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用 잃은 신용카드 안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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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갑을 열어 본다. 한 줄에 두 칸씩 모두 여섯 칸으로 나뉘어 있는 카드 집의 첫줄엔 병원 진료카드 두장, 백화점 카드 두장이 들어 있다. 그럼 둘째 줄엔 ?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유통업체 카드들. 마지막 줄엔 신협의 현금카드와 은행이 발급한 신용카드, 이런저런 업소의 보너스 적립 카드 세장이다.

외상거래를 할 수 있는 신용카드는 모두 다섯장. 현대는 '소비가 미덕'이라는데 내 처지에 합당한 걸까, 아니면 ? 미국인들은 평균 열개의 신용카드가 있다지만 그래도 이 다섯개의 신용카드가 토해내는 전표들도 결코 적지 않을 터.

느닷없이 지갑 속 카드를 들춘 것은 명문대 중퇴생이 낀 카드사범들의 수법이 쓰레기통에 버린 신용카드 매출전표를 활용했다는 뉴스를 접하고서다. 당장 돈이 없어도 되고 일부는 나눠낼 수조차 있다는 느긋함의 유혹. 일정 사용액은 세금 감면 혜택. 거기에 봉급생활자인 나의 몇곱을 벌어들이면서도 세금은 몇분의1에 그치는 이들의 탈세를 방조하지 말자는 '사명감'까지 보태져 카드 사용에 열과 성을 다하는지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건 이후 여기저기서 신용카드나 전표를 잘 관리하란다. 잘게 찢거나 불태워버리면 지능적인 신용카드 사기범들을 피할 수 있을까 ? 천만에. 지금 같은 신용카드 사용법이 유지되는 한 그것은 결코 해결책이 아님을 사용자라면 누구나 안다. 고객의 신용카드를 복제하는 사기범들까지 있고, 사기를 유혹하는 느슨한 결제망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비밀번호가 따로 없는 신용카드도 많다. 관계기관은 분실·도난 신고 이전에도 카드 뒷면에 서명하는 것을 잊었다든지, 옮긴 주소를 카드사에 통보하지 않아 부정사용 사실을 알지 못한 경우 등이 아니라면 언제든 보상받게끔 피해자 구제책을 내놓았지만 미봉책에 불과하다. 원인 제거책이 아닌 탓이다.

비밀번호나 주민등록번호 같은 본인 확인 절차가 누락된 인터넷 쇼핑몰이나 케이블 TV의 홈쇼핑 채널들에 대해서는 강력한 행정지도를 할 수 있도록 관련 법규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감시해야 한다. 신용카드사에도 회원을 적극 보호할 의무가 있음을 일깨워야 한다. 제도적으로 가맹점에 대한 주의의무를 부과해 본인 확인 장치가 없는 가맹점과는 애당초 계약을 금지해 지금 같은 '미서명 수기 특약'이 발붙일 수 없게 해야 한다.

동시에 잘못된 우리의 생활습관을 바꾸기 위한 사회적 노력도 필요하다. 이용객이 건네준 카드를 '스키머'로 복제해 사용하다 검거된 주유소 종업원들의 카드사기 사건은 언제나 소비자가 계산대에서 지불해야 함을 역설적으로 웅변해준다.

나는 이런 분위기 조성을 위해 서민 소비생활의 원천인 백화점부터 지불시스템을 바꿔볼 것을 제안한다.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 백화점에는 군데 군데 계산대가 있어 고객이 직접 물건값을 낸다. 그러나 우리 백화점에서는 매장의 점원들이 신용카드의 비밀번호까지 물어가며 대신 결제한다. 현금거래에서는 이것이 고객에 대한 서비스일 수 있지만 신용카드 시대에는 걸맞지 않다. 비밀번호라는 보호장치마저 무용지물로 만드는 이런 결제서비스야말로 신용카드를 남에게 함부로 맡겨도 된다는 그릇된 인식을 형성한다. 은행창구의 번호표 발행이 사회 곳곳에 파고들며 요행성 줄서기 문화를 바꾸었듯 백화점의 지불계산대 설치가 낡은 지불습관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

『신용카드의 제국』을 쓴 로버트 매닝은 현대인을 중독시킨 신용카드의 비밀을 파헤치며 지불능력 이상으로 사용해 빚더미에 올라 앉은 개인들마저 따지고 보면 신용카드체제가 빚은 피해자들이라고 했다. 하물며 하루가 다르게 팽창해가는 신용카드의 제국에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힘없는 신민들에게 안전망조차 갖춰주지 않고 '모든 것은 네 탓'이라고만 한다면 곤란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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