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레임덕 현상 가속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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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의 탄생이 무산되면서 정국에 파란이 일고 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권력누수 심화로 임기말 마무리에 어려움을 겪게 됐다. 8·8 국회의원 재·보선과 연말 대선을 앞둔 민주당과 한나라당 등 정치권도 정국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양당의 정치공방 격화로 정국의 긴장도도 높아지고 있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金대통령이다. 그는 7개월 남은 임기를 무난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여성 총리' 카드를 꺼냈지만 실패했다. 정치중립의 의지를 과시하고 여성계의 지지까지 노린 회심의 선택이 물거품이 돼버린 것이다.

金대통령의 권위도 추락했다. 민주당 의원 상당수가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에 반기(反旗)를 듦으로써 자신의 손때가 묻은 정당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러니 레임덕(임기말 권력누수)현상이 심해질 것은 뻔하다.

金대통령은 이제 이른 시일 안에 새 총리내정자를 지명해야 한다. 그러나 국회 인사청문회와 인준의 관문을 통과할 인재를 갑자기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휴가 중인 金대통령이 총리감을 물색하고, 국회 인사청문회가 다시 열리는 동안 행정부의 기강은 더욱 해이해질 것이다. 선장 없는 내각이 金대통령을 일사불란하게 보좌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레임덕과 국정표류 현상이 노()대통령을 괴롭힐 것이다. 한 민주당 의원이 "이제 대통령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탄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치권에도 격랑의 회오리가 몰아닥칠 것으로 보인다.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정쟁(政爭)은 더욱 불꽃을 튀길 것이며, 민주당 내부의 갈등도 악화할 가능성이 크다.

민주당은 張총리서리의 인준안 부결을 한나라당 책임으로 돌렸다. "한나라당이 국정혼선과 표류를 야기할 목적으로 반대표를 집단적으로 던졌다"는 것이다. 노무현(武鉉)대통령후보는 이날 당장 서울 금천 지원유세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이 총리인준을 하면서 도덕성이 중요하다고 기준을 세웠다면 한나라당 이회창(會昌)후보는 사퇴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공격하고 나섰다. 이른바 '이회창 5대의혹'도 더욱 강력히 제기하고, "한나라당 때문에 여성 총리 탄생이 좌절됐다"며 여성계를 자극하는 전략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민주당 내부에서도 반란표가 많이 나온 이상 이런 논리가 얼마나 먹힐지는 의문이다. 민주당에선 어느 쪽이 반대표를 던졌는지 친노(親)-반노(反) 측이 서로 의심하는 분위기다. 신당 창당을 둘러싸고 대치 중인 양측은 인준안 부결의 책임을 놓고도 힘겨루기를 할 것 같다. 아무튼 '노무현 대통령후보-한화갑 대표'체제가 이번에도 리더십의 한계를 노출한 만큼 '신당론'은 한층 탄력을 받을 수도 있다.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도 후폭풍을 염려해야 할 처지가 됐다.대다수 의원이 반대표를 던진 게 확실하므로 '견제론'이 먹힐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오만한 한나라당' 주장이 다시 나올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회창 후보에 대한 민주당의 공세가 더욱 거칠어질 것이라는 점도 가볍게 넘길 수 없게 됐다. 민주당의 공격에 자꾸 맞대응하다 보면 후보에게 정쟁의 이미지가 누적될지 모른다.

여성계의 반발 가능성도 걱정거리다.당직자들은 "張총리서리 인준안 부결은 그의 도덕적 흠결 탓이지 여성이기 때문은 아니다"고 강조한다. 민심이 어떻게 흐를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이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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