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팔로어 전략 이후를 찾아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75호 24면

“실적도 없고 모멘텀도 없다. 시장의 관심도 없어지고 있다.”
HMC투자증권의 노근창 수석연구위원은 최근 내놓은 분석보고서에서 LG전자에 대해 “3무(無)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고 표현했다. 일반적으로 전자·통신업체들은 매년 1분기에 실적이 좋지 못하다. 하지만 증권가에선 LG전자의 2분기 실적이 1분기보다 오히려 더 나빠질 것으로 보고 있다. 스마트폰과 발광다이오드(LED) TV, 3D TV 등 수익성이 높은 첨단 제품 분야에서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애널리스트는 “더 큰 문제는 하반기에도 실적이 나아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올 들어 이 회사 주가는 20% 이상 떨어져 지난달에는 9만원대에 머물렀다. LG전자의 최고경영자(CEO) 남용 부회장의 주름살이 깊어지는 이유다.

남용 LG전자 부회장의 고민

구본무 회장 “조급해 말라” 재신임
지난해 11월 남 부회장은 ‘컨센서스 미팅(CM)’에서 구본무 LG그룹 회장에게 “스마트폰과 LED TV 부문을 강화하겠다”고 보고했다. CM은 그룹 수뇌부와 핵심 계열사 경영진이 머리를 맞대는 자리로 매년 두 차례 열린다. 구 회장은 “경영 환경이 불투명하다고 해서 움츠러들지 말라”며 “사업 계획에서 도전적인 목표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LG전자는 지난해 2분기와 3분기에 세계적인 경기 침체를 딛고 1조원을 넘나드는 영업이익을 올렸다.

올 6월 구 회장과 남 부회장은 다시 마주 앉았다. LG그룹 관계자는 “어느 때보다 무거운 분위기에서 CM이 진행됐다”고 전했다. 지난해 4분기 이후 LG전자의 영업이익은 분기당 4000억원 안팎으로 줄었다. 올 2분기에는 2000억원 수준까지 떨어질 것이란 전망이 많다. 휴대전화 분야에서 4년 만에 처음으로 적자를 볼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일각에선 남 부회장 책임론까지 거론되기도 했다.

하지만 구 회장은 남 부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이달 6일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그룹 경영진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임원 세미나에서 “어려워진 사업일수록 이를 극복하기 위한 리더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며 “위축되거나 조급해하지 말고 경영진을 중심으로 힘을 모아, 재도약의 기회로 바꿔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신임을 받은 남 부회장은 다음 날 LG전자 그룹장 300여 명을 모아 세미나를 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위기가 곧 기회”라고 강조했다. 그는 남아공 월드컵을 예로 들며 “선수들의 자신감이 부족하면 경기에서 질 수밖에 없다”며 “이기는 조직이 되기 위해서는 긍정의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남 부회장은 ‘고객 인사이트(통찰력)’를 앞세워 2007년 이후 3년간 LG전자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다. 그는 어느 경영자보다 현장을 중시한다. 매년 70여 개국을 돌며 매장과 고객 가정을 찾는다. 솔직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방문 장소도 외부 업체에서 선택한다. 국적 불문, 세계 최고의 인재들을 영입해 글로벌 경영에도 앞장섰다. 2007년 12월엔 최고마케팅책임자(CMO)에 아일랜드 국적의 더모트 보든 부사장을 영입했다. 최고구매책임자(CPO)로는 미국 IBM 출신의 토머스 린튼 부사장을, 최고공급망관리책임자(CSCO)로는 HP 출신의 디디에 셰네보를 임명했다. LG전자는 휴대전화 분야에서 모토로라를 제치고 3위에 올랐고, TV에서는 소니를 앞질러 2위를 차지했다.

잘나가던 ‘남용호’에 급브레이크가 걸린 것은 환율을 비롯한 외부 요인의 영향이 크다. 특히 LCD TV의 경우 유럽 재정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해엔 서유럽에서 전체 판매의 3분의 1 이상인 180만 대를 팔았다. 그런데 올 들어 터진 그리스발 유럽 경제위기가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소니가 저가 전략으로 맞불을 지피면서 매출·이익이 급감했다.

새로운 시장에 재빨리 대응하지 못하는 ‘스마트 팔로어(1등 따라하기)’ 전략도 한계를 드러냈다. 선행 투자와 새 시장 개척은 성공할 경우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지만 실패의 위험도 그만큼 크다. 대신 남이 먼저 개척한 분야에 따라 들어가 안정적인 수익을 얻는 것이 스마트 팔로어다. LG전자는 능동형발광다이오드(AMOLED) 디스플레이, LED 패널, 스마트폰 분야에서도 이런 전략을 펼쳤다. 그러나 문제는 시장의 법칙이 달라지면서 불거졌다. 과거엔 한 발짝 늦어도 추격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반 발짝만 뒤처져도 여간해서는 따라잡기 어려워진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스마트폰이다. 휴대전화 부문 관계자는 “삼성전자처럼 욕이라도 먹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애플의 아이폰3GS와 선두 자리를 놓고 한판 승부를 벌이느라 구설에 오른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삼성전자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성장했다. 최근 내놓은 갤럭시S는 ‘아이폰 못지않다’는 호평을 받으며 순조롭게 스마트폰 시장에 진입하고 있다. 반면 LG전자는 스마트폰 대신 아레나·뉴초컬릿 같은 고가 일반 단말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시장은 이미 스마트폰으로 급속히 대체되면서 비스마트폰의 수익은 형편없이 떨어지고 있다. 지난해 1분기 4조원을 넘보던 LG전자의 휴대전화 매출은 올 1분기 3조원을 겨우 넘겼다. 같은 기간 판매량은 450만 대가 늘었다. 이익이 많이 남는 고가 단말기 시장에서 밀려난 데다 저가·할인 판매가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다. 윤혁진 신영증권 애널리스트는 “지금 LG전자에 가장 필요한 것은 시장을 선도하는 텐밀리언셀러 폰의 등장”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3년이 LG전자 운명 가를 것”
남 부회장은 하반기 이후에 기대를 걸고 있다. 3분기에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인 ‘옵티머스원 위드 구글’을 선보이고 연내에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폰7도 내놓을 예정이다. 지난해 말 이후 글로벌 상품기획 담당을 부사장급으로 격상하고 스마트폰용 콘텐트와 소프트웨어 개발 인력도 늘렸다. 올 연말부터는 본격적인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TV 분야도 실지 회복을 노린다. 유럽 거래처들은 장기적인 관계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불황기에도 수익성 악화를 무릅쓰고 물량 공급을 유지했으니 경기가 회복 국면에 들어가면 시장점유율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시장의 반응은 엇갈린다. 전성훈 유진투자증권 연구위원은 “주력이던 고가 일반폰 시장에서 스마트폰 경쟁에 너무 늦게 뛰어들었다”며 “선두 주자들을 따라가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휴대전화 분야는 LG전자 매출의 30%, 이익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휴대전화가 흔들리면 실적 회복이 쉽지 않다는 의미다. 반면 최악의 시기는 지나갔다는 분석도 나온다. 씨티그룹은 “새로운 스마트폰 제품과 향상된 3D LED TV가 앞으로 핵심적인 상승 동력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남 부회장은 중장기적으로 기업간거래(B2B)·헬스케어·태양전지 같은 새로운 사업 분야에 기대를 걸고 있다. 지난달에는 경북 구미에 태양전지 라인을 완공하고 태양전지판을 붙인 하이브리드 에어컨을 선보이기도 했다. 또 올 상반기 신입사원의 30%를 소프트웨어 관련 인력으로 뽑는 등 체질 개선도 서두르고 있다. 그는 올 들어 수시로 “앞으로 3년이 LG전자의 운명을 가름할 중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새 사업들이 궤도에 오를 때까지 휴대전화와 TV가 얼마나 버팀목 역할을 해줄 수 있을지에 ‘남용 구상’의 성패가 달려 있는 셈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