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격식을 깬 '6월의 전설'엔 삶의 진정한 모습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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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막걸리를 마신 다음에는 손등으로 입 언저리를 슬쩍 쓰다듬어야 한다. 보시기에 담긴 시어빠진 김치 냄새가 확 달려들면서 먼저 뱃속에 들어간 막걸리 냄새를 만나 길고도 걸쭉한 트림을 부추겨 올리는데…, 후각적인 면만 차치한다면 사실 건강 만점의 트로피다.

이번에는 입가에 묻은 김칫국물 때문에 잠시 어색한 침묵. 그런 다음에는 어느 누구든 소원한 격식이 필요할까보냐? 십년지기의 과장된 친밀감으로 주변을 아우르기까지 일사천리. 세계가 다 인정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성급함을. 그러나 우리는 아니라고 한다. 우리들의 천부적인 솔직함이고 남이 이해하기 힘든 정이라고 한다.

소주잔을 비운 다음에는 '칵'하는 탁음을 곁들여야 한다. 맛이 제격이어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그 소리가 맛을 제격으로 완성시키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칵테일이나 와인에 이 소리를 냈다가는 집안 망신거리가 된다.

이제 맥주는 시골 구멍가게에서 모기향 붙여놓고 마시는 술로 강등되었으나 여전히 어느 고급 레스토랑에서도 마음 편하게 주문할 수 있는 음료수다. 주막집 주모가 카페마담을 겸하는 팔방미인격의 마당발 시대가 온 것이다.

오로지 맥주가 아니면 안되는 데가 하나 있다. 다름아닌 열차식당이다. 기적소리, 증기기관차 시대로부터 디젤엔진이 전기엔진으로 바뀐 지 오래되었는데도 여전히 열차식당에서는 맥주가 낭만의 패권을 꽉 쥐고 있다.

나는 막걸리와 소주와 맥주의 음주문화를 바로크라고 하고 싶다. 이번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어느덧 우리 앞에 우뚝 서있는 바로크의 위용을 보았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격식의 틀에서 훌훌 벗어난 개성의 멋, 자유방임, 세련된 고급 취향을 무시하는 시민공동체 의식, 패션과는 거리가 먼 남녀노소의 붉은 티셔츠 군단의 물결과 화장술에 반란을 일으킨 펑키(PUNKY)분장의 범람과 엇박자의 함성 속에서 우리는 분명히 보았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팀과 함께 어제까지 우리의 우상이었던 로코코(Rococo)의 퇴장을. 우리 앞에 새롭고도 대단한 시대의 도래를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억센 뼈대와 우람한 근육, 검게 탄 피부 위에 흐르는 땀방울의 야성을 이렇게 찬미하고 흠모하고 존경한 적이 단군 이래로 있었던가? 그리고 왜곡할 수 없는 규칙의 존엄성을 이처럼 찬란하게 체험한 적이 있었던가?

어느 순간 우리의 묵은 분장이 지워지고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우리의 모습에 당황하고 있는 우리, 몽골리안, 기마민족으로 복귀하는 의식이 아니었던가? 17세기의 스페인, 18세기의 영국과 프랑스, 20세기의 일본과 미국이 제국주의의 패권을 잡는데 성공했다. 승자와 패자가 쓰는 역사는 서로 다르다. 승자는 영광의 수다를, 패자는 기록할 수 없는 기록의 겉장을 눈물로 쓰게 된다. 그러나 승자가 누리는 승자의 영예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노력과 용기와 도전정신이 있었고 지도자가 있었고 그리고 행운이 따라주었다. 이 역사의 축소판이 월드컵이 아니었던가?

애벌레가 우화를 거쳐서 나비가 되는 것. 바로크에서 로코코로의 자연스러운 이행이다. 그러나 나비에게는 머지않아 닥칠 삭풍 앞과 그 영락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크를 겪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보인 우리의 로코코는 진정한 로코코가 아니라 일종의 건조성 피부질환이었던 셈이다. 이제 우리의 진정한 바로크 시대를 환영하자. 막걸리와 소주와 맥주 만세.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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