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 '民藝論'엔 인간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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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민예론의 주창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우리에게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한국 미술의 조형미를 알아본 심미안의 소유자이자, 한국 미술의 미적 특징을 '무기교의 기교''자연에의 순응' 등 좁은 의미로 가둬버린 원인 제공자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한국 미술사의 특질에 대한 규정으로까지 확대돼 왔던 야나기의 공예이론이 비판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강우방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지난해 말 펴낸 『한국 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월간미술)에서 "한국 미술의 특질이 민예적이라는 오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미술사학에 엄청난 오류가 생겼다"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일본의 공예연구가 이데카와 나오키는 『인간 부흥의 공예』에서 야나기의 공예이론에 대해 전면 비판한다. 야나기의 주장은 인간성이 무시된 이론이며 현실 사회에 기여할 수 없는 이론이라고 비판되기까지 한다.

"뒷사람들이 뭔가를 덧붙일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완전한 논의를 망라했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추종자 그룹까지 둔 야나기의 위상이 이제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야나기는 공예의 아름다움을 평상심·건강함·무심(無心)함·무사(無事)함의 아름다움이라고 주장했다. 배우지 못해 아름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명의 공인들이 작위나 미의식을 갖지 않고 무심하게 반복해서 작품을 만들면, 신의 은총 같은 '타력(他力)'에 의해 작품에 올바르고 지고한 아름다움이 깃들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예에서 공인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 경우 공인이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개인작가의 작품을 흉내내 물건을 만들다 우연한 기회에 걸작품을 탄생시키고, 그 소박하고 간명한 미를 야나기 같은 인물이 찾아내주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수동적인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이데카와는 야나기가 1926년 쓴 '잡기(雜器)의 미'와 그 글에서 더 나가지 않은 민예론에는 이처럼 '인간성'이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야나기가 찾아낸 기물(器物)들만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이 이론도 완벽하겠지만, 세상은 어찌됐든 인간의 것이다. 주체를 빼고 객체만을 놓고 미를 논하는 것은 자의적이고 절름발이일 뿐이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군국주의 일본의 1920년대, 가슴 따뜻한 상류층 청년은 공예품 같은 문화 저변에 자연스레 관심이 갔을 것이다. 그리고 야나기는 활발한 언론 활동을 통해 민예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두가지. 열렬한 동조나 철저한 무시였다. 반대론자들도 이론으로 따지기보다는 침묵하고 말았으니 야나기의 민예운동은 별다른 비판없이 순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비판이 이론의 완결성을 담보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직관이 빚어낸 증거 불충분은 이데카와에 의해 곳곳에서 반박당한다. 야나기는 한국 공예에 대해 '비애의 예술'이며, 그 진수는 '곡선과 흰색'이고, 조선 공예의 이런 몇가지 성질은 한민족이 적극적인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 냈다는 발언을 남겼다.

그러나 이데카와는 코발트가 거의 생산되지 않았던 조선시대 환경 요인과 백자 제기(祭器)가 많이 쓰인 사회적 요인이 작용한 때문으로 봤다. 그런 속에서 사람들의 순백자에 대한 선택과 기호가 늘었을 수는 있으나 민족 감정을 표출하기 위해 민중이 순백자를 골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조선의 비애를 보여주는 예라고 야나기가 제시한 '추초문'도 조선 공예의 대표적 문양이라 하기에는 무리고 오히려 모란문이 많이 쓰였다고 이데카와는 주장한다.

물론 야나기가 발견해낸 소박함·간결함·자연스러움·재질감이 한 양식의 기초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야나기는 옛 물건에서 그런 요소들을 발견하고 기뻐할 뿐 이를 다른 분야에 이용해 재구축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역사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구라사키 민예관을 찾았다가 그곳 관장의 야나기 추종에 내심 놀랐다가, 이 책을 읽고 자신의 무지몽매함을 깨우쳤다며 저자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일본 사회에서 지나치게 공고했던 야나기의 위치가 이제야 제 자리를 찾아간다는 방증으로 비춰진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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