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라 방역을 위해 출동한 의료진이 마을 주민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검진하고 있다. 지휘 책임자는 의사나 보건 전문가가 아니라 경찰이었는데, 그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이를 선의의 위생 행정으로 보지 않고 ‘처벌’이나 ‘강압’으로 느꼈다. <사진 출처:‘호열자병 방역지’, 1920년>
국가는 개인과 사회의 건강을 보살필 책임을 진다는 관념이 형성된 이래 위생 문제는 공적 생활과 사생활의 경계를 흐리게 했고, 국가가 사생활에 간섭할 길을 넓혀주었다. 사생활의 자유를 누리려는 개인의 욕망은 공공의 안녕을 위해서는 국가의 간섭을 용인해야 한다는 논리와 현실 앞에 자주 무릎을 꿇었다.
1920년 7월 15일, 조선총독부는 공중위생에 관한 자문기구로 ‘조선중앙위생회’를 조직하는 동시에 ‘조선 전염병 및 지방병 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조선의 기후 풍토와 조선인의 생활 관습이 한반도 전역의 위생 문제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고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이는 위생 행정을 한층 강화하겠다는 총독부의 의지를 보여주기는 했을지언정 조선의 위생 상태를 개선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위생 문제에 관한 총독부의 관심은 조선인의 열악한 위생 상태가 일본인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데에 머물러 있었고, 더구나 당시 위생 행정은 전적으로 경찰의 몫이었다. 보건 위생에 관한 전문적 식견이 없는 경찰의 간섭은 조선인의 반발심만 자극하여 집안에 전염병 환자가 발생해도 숨기기에 급급하는 상황을 빚어냈다.
해방 뒤 미군정이 처음 한 일은 위생 행정을 경찰 업무에서 떼어내 전문가들에게 맡긴 것이다. 보건후생부가 신설되었고, 보건 전문가가 양성되기 시작했다. 이후 반세기 동안 국가는 보건위생 사무를 매개로 국민들의 사생활에 개입하여 비위생적 요소들을 솎아냈다. 국민들도 국가의 개입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니 오늘날 건강보험공단에 집적된 방대한 개인정보는 모범적인 위생 국가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이면이다. 이 정보의 오용을 막는 것도 자유 국가의 당연한 책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