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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영그는 개성의 꿈

중앙일보

입력

개성까지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그러나 여느 길과 사뭇 달랐다. 파주를 거쳐 판문군에 이르는 광활한 길은 왕복 8차선 도로도 너끈해 보였지만 어깨길처럼 가장자리에 2차선 도로가 나뉘어 있을 뿐, 막상 중앙은 누런 잔디로 휑했다. 이따금 그다지 크지 않은 두세 그루의 나무가 계면쩍은 듯 서 있어 더욱 기이했다.

낯선 도로 풍경을 이해하는 힌트는 남측 비무장지대인 장단역 철로에 멈춰 있는 폭격당한 열차다. 서울이 지척임을 감안해 혹여라도 널따란 도로가 적의 공격로가 되는 것을 막으려는 배려임에 분명했다. 한국전쟁의 상흔은 이렇듯 깊다. 그러나 정작 비무장지대에서 만난 북측 도로의 풍경은 친숙했다. 길게 늘어선 가드레일과 가로등이 서울에서 눈익은 것들인 까닭이다. 차창으로 비치는 낯설고 또 익숙한 도로 풍경을 보며 북과 남의 현재를 실감했다.

이정표 없이도 남측과 북측의 한계를 명확히 알 수 있다는 안내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루 평균 343명, 131대의 차량이 도라산과 개성공업지구를 드나들지만 아직 북측에 깔린 아스팔트는 남측과 확연히 구별될 정도로 검었다. 남측과 북측의 '경제 비무장지대'는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현대아산이 북측으로부터 2052년까지 2000만평의 토지이용권을 따낸 개성공업지구. 이곳은 한겨울의 추위도 아랑곳없이 한쪽에선 공장 건설, 다른 한쪽에선 언덕을 깎아 땅을 고르는 부지 조성작업으로 흙먼지가 휘날렸다. 1단계인 100만평 부지 조성 공사의 진척률은 44%. 시범단지의 공장 가동도 이어져 지난 15일 리빙아트의 냄비 출하를 시작으로 28일엔 에스제이테크가 초정밀 플리스틱부품인 유공압패킹을 생산했다. 1월이면 신원의 의류제품이 선보인다. 내년 5월 시범단지 15개 전 업체의 공장 가동이 영 불가능한 꿈은 아니다.

개성공업지구에 버스로 출퇴근하는 북측 근로자들은 현재 1288명. 한 달 임금은 57.5달러(약 6만원)다. 출퇴근 등 부대비용이 든다고 해도 우리나라가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불러오는 산업연수생들의 근처에도 못갈 정도로 헐값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를 기다린다. "연내 공장이 준공되지 않으면 천막이라도 치고 공장을 돌릴 생각이었다"는 에스제이테크 유창근 사장은 시범단지를 '투자를 위한 믿음의 자리'라 말한다. "사장선생, 진짜 들어오는 것입네까? 행사는 많이 하는데 진척은 안 되는 것 같습네다"하던 북측의 말을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공장에서는 북측 근로자가 남측 기술자의 어깨너머 기계조작법과 불량품 선별법을 익히고 있고, 우리은행 지점의 창구에는 김일성 배지를 단 북한여성과 남측 남성 직원이 나란히 손님을 맞고 있다. 행정관청역을 맡은 개성공업단지관리위원회는 내년 1월 북측 협력부를 개설한다. 비록 패밀리 마트에서 야참 라면 한 개를 살 때에도 달러를 지급해야 하는 곳이지만 희망은 이곳에 있다. 처음으로 남측과 북측이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민족의 거대한 실험장인 까닭이다.

개성공업지구에는 꿈을 가진 자만이 살 수 있다. 그들이 100만평의 광활한 대지를 철빔으로 채워나가는 만큼 개성의 꿈도 영글어진다. 일자리를 만들어 후손의 미래를 심고 싶다는 개성의 꿈은 느리지만 착실하게 현실로 환원되고 있다. 우리이면서도 우리가 아닌, 이방인이면서도 이방인이 아닌, 그런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개성공업지구. 분업 공장이나 산업 간 협력사업으로 더 큰 꿈을 꾸며 이들은 평화의 씨앗을 뿌린다.

누구나 꿈을 꾼다. 그러나 꿈을 이루기란 어렵다. 오직 가능성을 믿고, 포기하지 않는 이에게만 꿈은 실현된다. 저물어 가는 갑신년, 그 끝자락에서 2004년이 남겨준 가르침이다.

홍은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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