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실망시키지 않는 국회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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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회가 40여일 간의 위법(違法) 상태를 모면했다. 오직 당략만을 이유로 장기간 제16대 후반기 원(院)구성을 미뤄온 만큼 '그나마 다행'이라는 의례적 수사(修辭)마저 붙이기 아까울 정도다. 식물국회에 대한 국민적 비난에 아랑곳 않고 의장단·상임위원장 자리에 그토록 집착하던 정치권은 끝까지 '철'이 날 기색을 보이지 않은 채 힘겹게 원구성을 마쳤다.

어렵사리 출범한 국회가 제대로 기능할지 이마저 기대하기 어려운 게 더욱 걱정되는 현실이다.실제 이어질 정치일정이나 다뤄질 현안들은 정파 간의 날카로운 대립을 촉발시키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바로 한달 뒤면 대선 전초전이라할 8·8 재·보선이 실시된다. 12월 대선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정파들은 전국 13개 지역에서 실시될 '미니 총선'에 전력투구할 게 뻔하다. 쟁점들도 권력형 비리,공적자금 상환대책 등 정치 기상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만한 것들이어서 관련 국정조사나 청문회 요구가 불을 뿜게 될 터다. 여기에 정계개편까지 뒤얽히면 이래저래 생산적 국회는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러다간 박관용(朴寬用) 신임의장의 국회는 당장 벌어진 서해교전이나 태풍피해 정도나 다룬 뒤 개점휴업 상태에 빠져들 공산이 크다. 벌써 몇개월째 미뤄온 민생법안들은 자칫 뒷전에 밀릴지도 모른다.

각 정파가 8·8 재·보선과 대선에 주력하는 바를 나무라는 게 아니다. 집권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책무, 즉 입법활동마저 포기한 채 정쟁만 일삼아선 안된다는 얘기다.또 그 과정에서 다수의 오만을 경계해야 하지만 소수의 횡포·생떼도 버려야 한다.

국민은 정파 이기주의와 입발림에 속지 않을 만큼 성숙해 있다. 따라서 국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는 게 지지를 확대하는 최선의 방책임을 알아야 한다. 더 이상 국민을 실망시키지 않는 국회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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