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核과 장기수 '바누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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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최근 이스라엘 신문들은 한 장기수(長期囚)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모르데차이 바누누. 47세. 반역죄로 18년 형을 선고받고 텔아비브 인근 아시켈론의 시크마 형무소에서 16년째 복역 중.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잊고 있었다. 기사를 읽고 나서야 희미한 기억 속에서 '바누누 사건'을 떠올릴 수 있었다.

1986년 10월 5일 영국 선데이 타임스는 1면 머리기사로 '이스라엘 핵무기의 비밀'이라는 폭로기사를 게재했다. 취재원은 이스라엘 네게브사막의 디모나 핵시설에서 기술자로 일했던 바누누. 타임스는 인터뷰 기사와 함께 사진 57장을 실었다. 핵전문가들은 이를 정밀 검토해 이스라엘이 약 2백개의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결론내렸다.

모로코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바누누는 9세 때 부모를 따라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76년부터 디모나에서 일했다. 79년 벤구리온대학에 입학해 철학과 지리학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한 바누누는 디모나에 복귀했다.

85년 초 바누누는 디모나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한 집회에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창설의 정당성을 주장한 것이 화근이었다.

바누누는 디모나의 주요 시설을 몰래 촬영했다. 디모나에서 해고당한 바누누는 호주로 가 택시 운전기사로 일한다. 그는 시드니에서 알게 된 한 기자에게 자신이 이스라엘의 핵무기 보유 사실을 알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선데이 타임스 기사가 나가자 이스라엘 정부는 궁지에 몰렸다. 이전까지 이스라엘은 핵무기에 대해 '모호성(ambiguity)' 원칙을 고수해 왔으나 바누누의 폭로로 핵무기 보유 사실이 드러나고 국제사회의 지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정보기관 모사드에 바누누 체포를 지시했다. 모사드는 '신디'라는 이름의 여성 요원을 급파했다.

유혹에 넘어간 바누누는 결국 체포돼 이스라엘로 연행됐다. 바누누는 법정에서 범행 동기를 "이스라엘 정부가 핵무기 보유를 더 이상 부인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반역죄를 적용해 18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시크마 형무소에 수감된 바누누는 12년을 독방에서 지냈다. 창문엔 두꺼운 커튼이 쳐져 밖을 내다볼 수 없었다.

바누누는 2년 후 있을 석방을 준비하고 있다. 건강을 위해 음식을 조절하고, 하루 네시간씩 복도를 걸으며 체력을 기르고 있다. 특히 건강한 정신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편지를 쓰고, 음악을 듣고, 비디오 영화를 시청한다. 석방 후 미국에 건너가 자신이 겪은 경험과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해 순회 강연을 할 계획이다.

미국은 이스라엘의 핵무기 보유를 묵인하고 있다. 이스라엘 작가 애브너 코언은 98년 『이스라엘과 핵폭탄』이란 책에서 미국은 이스라엘이 핵실험을 하지 않고 핵무기 문제로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이스라엘의 핵무기 보유를 허용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대량살상무기(WMD) 개발 의혹을 이유로 이라크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계획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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