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속 10㎝ 남짓 될까. 20세기 후반부를 둘러보는 사람들의 발걸음 속도다. 이 느린 속도도 번번이 무시된다. 전쟁·평화·슬픔·기쁨·죽음·탄생을 표현한 커다란 사진들이 관람객의 눈을 붙들었다. 사진마다 붙은 600자 내외의 설명글은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긴 줄이 생겼다. 서울 예술의전당 ‘퓰리처상 사진전’ 풍경이다.
한 관람객이 말했다. “머리로 보는 사진이 아니라 가슴으로 보는 사진입니다.” 그랬다. 이해하려 안간힘을 써야 하는 사진이 아니다. 엄숙한 공간에 걸려 있는 알듯 모를 듯한 영상과 달랐다. 퓰리처상 사진에는 피부색은 달라도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건이 있다. 동영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아닌 카메라 셔터가 잘라낸 정지된 사건이다. 그악스러운 폭력의 현장이든, 기쁜 재회의 순간이든 상관은 없다. 그 행위를 보고 느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나서 분노하던지, 공감하던지 하면 됐다. 전시장은 희로애락의 도가니였다. 145점의 사진이 가진 각각의 감정을 한꺼번에 버무린 비빔밥을 관객들은 원 없이 먹게 된다.
퓰리처상 1945년 수상작 ‘성조기, 수리바치 산에 게양되다’, 조 로젠탈, AP.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아버지의 깃발’ 포스터로도 인용됐다.
이렇게 많은 사진영상은 흘러가 듯 우리 눈 앞을 지나간다. 우리 눈은 흐르는 각 장면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결국, 하나의 영상이 아니라 여러 영상이 지나간 잔상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잔상 속의 이미지는 광고로 연결하기 쉽다. 원본 속에 있는 정확한 이미지보다 두리뭉실하게 이해한다. 그리고 그 인식이 긍정적인 뜻이 크다면 더욱더 광고효과는 커진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오지마 섬의 수리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를 세우는 조 로젠탈의 사진이 대표적이다. 실제로는 전투가 끝나지도 않았고, 사진 속 해병 중 3명을 포함한 6821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또한 쿠리바야시 타다미찌(栗林忠道) 중장이 지휘한 일본군은 옥쇄작전이 아닌 게릴라전을 펼쳐 31일 동안 미군을 괴롭혔다. 사진 속 깃대도 일본군의 지하진지 급수용 수도관이었다. 처참한 전장 속의 사진이지만 2차대전에서 미국승리를 상징한 사진으로 이만한 것이 없었다. 이후 이 사진은 끝내 승리했다는 이미지가 더욱 강해져 광고사진으로 종종 변주되곤 했다.
신인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