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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나무섬-日야쿠시마>원시와 만나는 '바다의 알프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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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락교 비(雨)'라니.

초밥에 곁들여 먹는 밑반찬이 바로 마늘 크기만한 락교. 그런 비를 맞았다간 우박을 된통 맞는 꼴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날 오후 일본 야쿠시마(屋久島)공항에 도착했을 때 제법 내린다 싶던 장마비는 '사쿠스키 랜드'의 산길을 넘으면서 장대비로 변한다. 일본원숭이와 고라니·사슴이 가로지르는 포장길이 끝나는 곳에 이르자 비바람이 광풍처럼 몰아치면서 세상이 일순간에 변했다. 1천m 높이의 산중. 비 폭탄이라고나 할까.

우박 같은 비를 맞으며…

내리꽂히는 락교 빗발이 빛을 삼켜 사위가 어둑한 가운데 산신의 세계가 비껴 나온다. 거목(巨木)들. 정확히는 거대한 삼나무. 고풍스러운 궁궐의 보호 철책 속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아름드리 거목이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쳐 있다. 붓다스기(佛陀衫)·가와가미스기(川上衫)·야마토스기(大和衫). 나무마다 이름이 있다.

슬쩍 소개서를 읽는다. 기겐스기(紀元衫). 수령(樹齡)3천년이라. '3천년은 무슨'하는 비웃음을 담고 기겐스기 옆에 팽개쳐져 있는 삼나무 터럭을 본다. 지름 2m 정도로 기겐스기보다는 작다. 톱으로 잘려서인지 진한 결과 옅은 결로 반복되는 나이테가 선명하다. 하나, 둘 셋 세 본다. 세상에…. 한뼘 반쯤 셌나. 숫자가 백을 넘는 것 같다. 머쓱하다.

거인 나라 나무인 양 고개를 90도 이상 바짝 젖혀야 끝이 보일 성싶은 나무들로 숲은 빼곡하다.

하늘을 가린 무성한 나뭇잎 위로 비 폭포 소리가 요란하다. 잎새의 초록을 벗겨낸 빗발은 안개를 피워가며 공기마저 푸르게 물들인다. 물살은 가파르게 내리굴러 장엄한 오케스트라가 된다.

'와당탕 퉁탕'.

바위를 밀어젖히며 달리는 물살이 어찌나 센지 88m 높이 오오고노다게(大川)폭포에서 떨어진 물은 다시 비상(飛上)한다.

'물과 숲의 교향곡'혹은 '바다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섬.

일본열도 규슈(九州) 남단 60㎞ 지점에는 태평양에서 몰려오는 태풍과 구름을 막아내겠다는 듯, 바다 위에 수호신마냥 불쑥 솟은 섬인 야쿠시마가 있다.1천4백만년 전 용암들의 싸움에 등이 터진 지각(地殼)은 한라산보다 높은 1천9백m 높이로 불쑥 솟아올라 우연히도 반경 20㎞의 둥근 섬을 만든다. 좁은 울타리를 못견디겠는지 산들은 바다로 가파르게 내리꽂힌다. 험한 지형에 펼쳐진 아열대에서 고지의 냉대에 이르는 원시 자연은 아직도 싱싱하게 보존돼 있다.

언제 그랬느냐 싶게 비가 갠 다음날 시라타니운스이쿄(白谷雲水峽)로 향했다. 섬의 북쪽 해안도로에서 갈라진 길을 구불구불 따라 오르면 해발 6백m쯤 되는 중턱에 소담한 산길이 시작된다. 계곡을 끼고 때론 돌과 나무로 깔끔하게 만들어진 폭 1m의 산책로를 따라 오르면 산신령의 집터다 싶은 삼나무가 나타난다.

야오이스기. 소개판을 보니 또 3천세다. 둘레 8m·높이 26m. 현(縣)정부에 따르면 수령 1천년이상 삼나무가 이 섬엔 46그루나 있다고 한다.

수령 7,200년 조몬삼나무

그중 대장급이 최대 추정 나이 7천2백년인 조몬(繩文)삼나무다. 신령급 나무답게 '뵙기가'어렵다. 땀을 흘리고 숨을 헉헉거리는 정성을 쏟아가며 6시간쯤 산속으로 들어가야 모습을 본다. 홀연히 솟아있는 기상이 범상치 않다. 키가 25m, 둘레 16.4m.

워낙 오래 살아 암에라도 걸린 듯 굴곡지고 뒤틀려 있다. 터진 피부와 줄기를 파고든 깊은 틈.그 사이로 7천년 역사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대체 고령의 삼나무가 이곳에 유독 많은 이유가 뭘까. '강수량이 충분하며 기온이 따뜻하기 때문'이란 말은 싱겁다. 비가 많다는 말은 맞다. 한달에 '35일'비가 온단다. 조몬삼나무가 사는 지역의 강우량은 연간 1만㎜ 이상이다.

아니 어쩌면 부드러운 관목숲, 검버섯 같은 바위로 둘러싸인 정상 미야노우라다케(宮之浦岳)에 사는 우주와 만물의 신 이쓰류다이곤(一品寶珠大權)덕일지 모른다. 신성(神聖)의 자락에 보호받은 싱싱한 원시성 때문에 섬은 1993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자연문화 유산'으로 지정됐다.

시도고가주마루 공원, 우이루손주 터럭, 해발 1천6백m 하나노에고(花之江河)고원, 나가타 다케 봉우리 등에는 태초에 만들어졌을 원시 DNA(유전자)가 공기에 떠돈다.

해서 야쿠시마는 아무나 오라고 손짓하는 곳은 아니다. 진정 자연이 그리운 사람만 갈 일이다. 생선회와 가라오케에 더 관심이 많다면 실망한다. 일본 국내에서는 제법 알려져 한해 20만명이 찾는다.

그렇다고 태평양의 시퍼런 물이 넘실대는 섬에 가서 땀만 흘릴 수는 없다.

군청색 바닷물을 한꺼풀 벗기면 그렇게 찬란할 수 없다. 섬 남쪽 만보항에서 반잠수함을 타고 나가면 얕은 바다 표면에 부딪혀 멍든 뒤 햇살을 받아 퍼지는 코발트 색 물속에서 생명들은 형형색색 아름답다.

태평양으로 지는 환상 노을

나가다니나가 해변에서는 태고 때부터 되풀이돼 온 생명의 사이클을 목격하게 된다. 어둠이 뒤덮인 해변 모래사장엔 등껍질만큼 무거운 고독을 얹고 알을 낳으러 올라온 거북이 몸을 드러낸다. 때묻지 않은 자연이다. 그것도 아니면 히라우치(平內)해안의 노천 유황온천에 몸을 담고 태평양으로 기우는 낙조의 아름다움을 감상해도 그만이다.

야쿠시마=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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