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27권에 논문 8편, 핸드백 속 200g짜리 서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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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호 10면

직장인 한은주씨는 전자책 전용단말기로 소설·논문 등을 읽는다. 한씨의 단말기는 넥스트파피루스의 ‘페이지 원’으로, 여느 단말기와 달리 자판이 없는 대신 무게가 좀 더 가볍다. 신동연 기자

직장인 한은주(34·법제처 연구원)씨는 출퇴근길에 들고 다니는 가방이 한결 가벼워졌다. 석 달 전 전자책 전용단말기를 산 덕분이다. “지하철에서 읽으려고 늘 한두 권 정도는 갖고 다녔어요. 그런데 이건(전자책 단말기) 책 한 권보다도 가볍고 작아요. 안에 넣어 갖고 다닐 수 있는 분량은 훨씬 많고요.” 현재 한씨의 단말기에는 소설 등 무려 27권의 책과 한씨의 전공인 법학 관련 논문 8편이 들어 있다. 한씨는 구매 전에 인터넷의 ‘이북카페’에서 기종별 정보를 꼼꼼히 살폈다. 전자책용 대표적 파일인 ePub뿐 아니라 PDF파일로 된 논문도 읽을 수 있는지, 또 갖고 다니기 얼마나 편리한지를 주로 염두에 뒀다. 그렇게 고른 지금의 단말기는 대개 300g 안팎인 여느 단말기보다도 가벼운 200g이다. 대신 다른 단말기들처럼 자판이나 무선인터넷 기능은 없다. 달리 말하면 최근 국내 출시된 다른 단말기들은 자판을 통한 검색·메모는 물론이고 기종에 따라 컴퓨터에 연결하지 않고도 인터넷으로 곧바로 전자책을 사보는 일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전용단말기들은 모두 e잉크라는 신기술을 통해 컴퓨터 화면과 달리 눈의 피로를 크게 던 것이 특징이다.

e북과 아이패드의 시대, 달라지는 독서의 기술

e잉크 사용해 눈의 피로 덜어줘
요즘 한씨는 출퇴근 지하철뿐 아니라 집에서도 전자책을 읽곤 한다. “종이책은 책장을 넘기려면 두 손이 필요한데, 단말기는 누워서 한 손으로 버튼만 눌러도 돼요. 물론 책갈피 기능도 있고요. 그게 아니라도 전원을 껐다 켜면 읽던 페이지가 그대로 나오거든요.” 한씨는 이미 종이책으로 읽은 소설을 전자책으로 사기도 했다. “공지영 작가를 좋아해서 전자책으로 나와 있는 걸 보고 단말기를 사면서 곧바로 구매했어요. 원하는 책이 종이책과 전자책으로 나란히 나와 있다면 이제는 전자책을 먼저 살 것 같아요. 전자책은 책장에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것도 장점이거든요. 전자책에 대한 설문조사를 보면 전자책이 종이책보다 싸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대부분인데, 제 경우는 원하는 책이라면 종이책과 같은 가격이라도 상관없다고 봐요.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사서 읽을 만한 전자책 콘텐트가 많지 않다는 점이죠.”

아이북스·스탄자 등을 이용해 아이폰으로 전자책을 읽는 한의사 이재성 원장. 신인섭 기자

한씨처럼 전용단말기로 전자책을 읽는 독자는 아직까지는 매우 적다. 지금까지 국내의 전용단말기 판매량은 기종별로 모두 합쳐도 많아야 3만 대 정도라는 게 업계의 추정이다. 그렇다고 전자책 독자가 이들뿐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얼리어답터인 한의사 이재성(41·행복의샘 한의원) 원장은 휴대전화로 전자책을 읽는다. 그는 지난달 말 아이폰으로도 아이북스(애플의 전자책 서점) 이용이 가능해지자 이를 곧바로 내려받았다. 이 원장은 그 이전에는 스탄자(아이폰용 전자책 뷰어)를 통해 아이폰에서 책을 읽었다. 화면은 작아도 글자 확대, 사전 검색, 메모 입력 등이 다 가능하다. “책에 따라 읽는 방법이 다른데, 여기 넣어둔 것은 되씹듯 거듭해서 읽는 책이에요. 휴대전화는 늘 들고 다니니까 짬짬이 마음을 가라앉히며 책을 읽는 데 편리하죠.”

그의 아이폰에는 책이 10권쯤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중 돈을 주고 산 건 없다. 아이북스는 현재 한국어 책이 지원되지 않는 데다, 영어를 비롯한 다른 언어의 책도 한국계정으로는 살 수 없는 상태다. 저작권 시효가 지난 고전 등 무료책만 내려받을 수 있다. 게다가 한 원장이 이전부터 아이폰에 넣어둔 애독서들은 국내에 전자책으로 나와 있지 않다. 그가 직접 본문을 입력하거나 영어원서를 번역한 뒤 이를 전자책용 파일로 전환한 것이다. 이런 수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휴대전화는 항상 손 안에 있는 도구라는 점에서 (전자책 시장에서) 파괴력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급하게 어딜 나가면서 전용단말기 같은 걸 챙겨가기는 힘들죠. 아이패드가 나와도 마찬가지고요.” 그는 “(콘텐트 시장이 활성화되면) 당장 보고 싶은 책, 급하게 원하는 정보가 실린 책을 밤낮 없이 바로 사서 볼 수 있는 것도 휴대전화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아이패드를 쓰는 대학생 김종찬씨. 개인출판으로 아이북스에 책도 펴냈다. [김종찬씨 제공]

휴대전화는 대다수의 사람이 갖고 다닌다는 점, 즉 보급률이 높은 것도 특징이다. 한국전자출판협회 장기영 사무국장은 “지금 같은 속도로 스마트폰이 보급돼 수백만 대에 이르면 가장 중요한 전자책 단말기가 될 수도 있다”며 “스마트폰으로 책을 보게 되면 손 안에 개인도서관을 들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실제로 교보문고는 최근 출시된 삼성전자의 갤럭시S에 전자책을 살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기본으로 탑재한 직후 전자책 판매가 눈에 띄게 늘었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전체 판매량이 작아 수치를 밝혀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늘어난 건 사실”이라며 “다른 휴대전화 기종도 쓸 수 있게 해 달라는 의견을 많이 받고 있다”고 말했다. 애플의 아이패드는 물론 삼성·LG 같은 국내 업체도 태블릿 PC를 내놓을 것이라는 점 역시 전자책 시장의 큰 관심사다. 한국출판콘텐트 신경렬 대표는 “기존의 텍스트 위주 전자책 시장에서는 미술·사진 관련 서적이나 어린이책은 별 장점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태블릿 PC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며 “어린이책의 경우 동영상 등 멀티미디어를 가미하는 방식을 개발해 국내뿐 아니라 해외시장도 겨냥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미 미국의 아이패드 사용자들에게 화제가 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이런 예다. 애플리케이션으로 나와 있는 이 책은 컬러 삽화의 일부분을 손으로 만지거나 화면을 가로·세로로 움직이면 그에 따라 삽화 속 인물의 목이 길어지거나 사물이 굴러떨어지는 식의 ‘움직이는 책’이다.

1인 출판으로 아이북스에 책 올려
국내에는 아직 출시되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김종찬(24)씨는 아이패드로도 책을 읽고 있다. “아이패드가 화면이 커서 시원시원하기는 한데, 휴대성에서는 아이폰이 편리해요. 두 개를 섞는 게 좋을 듯해요. 아이북스에서 한번 책을 사면 같은 계정으로 아이패드·아이폰·아이팟터치에서 다 볼 수 있거든요. 아이패드가 불편한 건 LED 화면이라 햇볕 아래서는 책을 읽기 힘들다는 점이죠(전자책 전용단말기는 종이책의 성격에 가까운 e잉크를 써 햇볕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는 반면, 빛이 없는 데서는 읽을 수 없다). 대신 컬러인 건 장점이죠. 축구 관련 책을 하나 보고 있는데, 선수들 사진이 다 컬러니까 훨씬 좋죠.”

김씨는 지난 4월 미국에서 아이패드가 처음 나올 당시에는 군복무를 마치고 잠깐 일을 하며 한국에 머물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전자책이 열어놓은 새로운 길을 시도할 준비를 했다. “아이패드가 나오고 한 달 뒤 애플이 아이북스에 개인출판을 허용한다고 발표했어요. 한국에서는 안 될 거라는 얘기가 있기에 한번 해보기로 했죠. 여기저기 물어보고 찾아보면서 구청에 출판사 등록을 하고, ISBN(국제표준으로 책마다 붙이는 고유번호)도 받고, 미국 국세청에서도 세금 아이디를 받고….” 김씨는 이런 개인출판 과정을 영문으로 써서 지난달 아이북스의 미국시장에 책으로 펴냈다. How to Publish your own books on iBooks store as an individual publisher라는 제목이다. 이 책은 그가 매긴 대로 0.99달러의 가격에 판매 중이다. 김씨의 경험은 전자책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전자책은 인쇄 비용이 필요 없다. 출판사를 거치지 않는 1인 출판이 한결 손쉽다.

발 빠른 사용자들의 이 같은 높은 관심에 비하면 사실 아직까지 국내 전자책 시장은 이모저모 기대에 못 미치는 상태다. 전자책 사용자들의 가장 큰 불만인 콘텐트 부족이 대표적이다. 문화부는 최근 전자출판산업 육성 방안을 발표하면서 현재의 문제점을 ▶신간·베스트셀러 등 콘텐트 공급 부족 ▶음악·영화 등의 저작권 보호 문제점이 전자출판산업에도 이어질 것이라는 출판계의 불안 내재 ▶이용자 편익을 위한 기술개발과 표준화 기술 확보에 대한 산업계의 관심 부족 ▶독서문화의 전반적 침체 등으로 정리했다. 달리 말하면 불법복제에 대한 출판계의 기본적인 우려가 있는 데다, 종이책 출판권 외에 전자책을 펴낼 권리를 확보하는 숙제 등으로 전자책 콘텐트 공급이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특히 해외 저자와는 디지털 저작권 계약이 거의 안 돼 있어 대부분의 번역서는 전자책으로 펴낼 수 없는 실정이다. 또 이처럼 콘텐트가 부족한 와중에도 인터넷서점마다, 단말기마다 호환성이 떨어지는 점도 전자책 이용자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인 10명 중 3명은 한 해 동안 책을 한 권도 안 읽을 정도로 독서율이 낮은 게 우리 형편이다. 새로운 전자책 읽기 도구가 독서문화에 어떤 자극이 될지도 주목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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