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짧아서, 미녀 앞에서 체면 구긴 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74호 16면

그녀는 성큼성큼 티잉 그라운드로 올라섰다. 어, 저기가 아닌데 아직 초보자이신 모양이군. 나는 가능하면 점잖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제원의 캘리포니아 골프 <119>

“저기, 여성분이 사용하는 레이디 티는 저 아래쪽인데요.”
그러자 그녀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알 듯 말 듯한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화이트 티가 편해요. 괜찮으면 여기서 같이 칠게요.”
뭐시라고라, 여성이 남자랑 같은 티에서 골프를 치겠다고라. 숙녀를 배려하겠다는 호의를 당돌하게 거절한 그녀의 행동에 나는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지만 나는 울컥한 심정을 억누르며 다시 신사도를 발휘했다.

“저기요, 너무 멀 텐데…. 정말로 괜찮겠어요.”
그녀가 내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녀는 가볍게 빈 스윙을 몇 번 하더니 허공을 가르며 거침없이 드라이브샷을 했다.
“쉬익~.”

골프공은 마치 초고속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듯한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그러고는 내 시야에서 한없이 멀어져만 갔다.

어, 이게 뭐지. 시방 이게 이 여자분이 친 게 맞는 건가.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안이 벙벙해 있는 내게 이번엔 그녀가 말했다.

“호호, 제가 거리가 좀 나는 편이에요. 어서 가시죠.”

그녀의 말에 따라 우리 일행은 서둘러 카트에 올랐다. 페어웨이엔 하얀 공 4개가 거의 비슷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우와, 이 여자 장난 아니군. 거리가 남자 못지않잖아. 그런데 내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연히 숙녀의 공이 맨 뒤에 떨어졌으리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내 공보다 그녀의 공이 10야드 이상 먼 곳에 떨어져 있었다. 어라, 이게 아닌데. 그제야 나는 그녀를 올려다봤다. 이름은 신○○. 모델 에이전시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나이는 40대 초·중반에 키는 1m75㎝쯤으로 보였다. 미끈한 몸매에 짧은 반바지 아래로 구릿빛 다리가 빛났다. 그녀는 세컨드 샷으로 가볍게 그린에 공을 올리더니 첫 홀부터 버디 찬스를 잡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버디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가볍게 파 세이브를 한 뒤 담담하게 아니 당당하게 홀아웃했다. 아, 그런데 그녀는 다음 홀에서도, 또 그 다음 홀에서도 화이트 티잉 그라운드에서 거침없이 티샷을 날렸다. 그때마다 그녀의 공은 똑바로, 멀리 뻗어나갔다. 거리는 230야드쯤, 쳤다 하면 어김없이 페어웨이를 갈랐고, 걸핏하면 ‘버디 찬스’였다.

그 다음부터 주눅이 든 건 나였다. 평소 드라이버만 잘 친다고 해서 ‘버만’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나였지만 아리따운 여성이 230야드를 펑펑 때려내자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거였다. 그녀의 드라이브샷은 어김없이 페어웨이를 가른 반면 내가 친 공은 산으로, 물로 날아가 버렸다. 그 다음은 이야기하지 않으련다. 그녀는 그날 화이트 티를 사용하면서도 버디 2개를 잡아냈다. 스코어는 79타. 아, 내 스코어는 얼마였냐고. 뭐, 숫자는 비슷했다. 단지 그녀의 스코어 앞자리와 뒷자리를 바꿨을 뿐이니까. 무더운 여름날, 그렇게 또 한번의 골프 잔혹사는 쓰였던 것이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