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의 세상사 편력

명예는 잊혀져도 허물은 지워지지 않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5면

월드컵 경기를 보다 문득 아이아스가 떠올랐습니다. 우루과이와 가나가 맞붙은 8강전 경기 말입니다. 1-1로 팽팽하던 연장전 후반 종료 직전, 가나 선수의 헤딩슛을 우루과이 선수가 손으로 쳐내지요. 이번 월드컵에서 유독 손을 쓰는 선수가 많아 눈에 거슬렸지만 이건 정말 아니었습니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명백하게 고의적인 반칙이었지요.

덕분에 우루과이는 4강에 올랐고, 당연히 4강에 올랐어야 할 가나 팀은 짐을 쌌습니다. 이래선 안 되는 거지요. 더욱 아닌 건 그 ‘신의 손’을 가진 선수의 태도입니다. 조금도 부끄러운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퇴장당해 경기장을 떠나는 순간 그는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가나 선수가 페널티킥을 실축하는 기적을 이뤄 달라고요. 미국 작가 앰브로즈 비어스의 『악마의 사전』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입니다.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지요. ‘지극히 부당하게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 우주의 법칙들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하는 행위.’

오 마이 갓! 그의 기도가 이뤄진 걸 보면 신이 졸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축구 팬이 아니었던 게지요. 반칙으로 승패를 바꿀 수 있다면 그건 스포츠가 아닙니다. 무뢰배들의 난장질일 뿐이지요. 그 선수는 인터뷰에서 말했답니다. “공이 날아오는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요. 그러면서 “내 퇴장으로 조국이 4강에 진출하게 돼 기쁘다”고도 했다지요.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말은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구차한 변명도 아니고, 군색한 핑계도 아닙니다. 정의를 능멸하는 짓이며, 원칙을 지키고자 애쓰는 사람들을 모욕하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편 골대를 통과하는 공을 절망적 눈길로 보면서도 손을 쓰지 못한 수많은 선수는 무엇이며, 상대의 반칙으로 억울하게 4강 진출이 좌절된 가나 선수들과 국민은 뭐가 됩니까.

스포츠뿐 아니라 매사가 다 그런 겁니다. 남들의 불륜은 욕하면서 자기는 로맨스라고 우기면 되겠나 이 말입니다. 최근 인기 여가수의 표절 시비도, 국무총리실의 민간사찰 논란도 다 그런 데서 출발한 겁니다. 자신과 남에 대한 잣대가 이렇게 다른 데서 모든 불화와 다툼이 싹트는 겁니다.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은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에서 한마디로 정의합니다. “남에게 당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남에게 하라는 것이 모든 전쟁의 바탕을 이루는 부도덕한 원칙이다.” 이는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습니다. 공자도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도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만큼 남을 대접하라”고 하고 있지요.

그래도 실속 있는 게 낫지 않냐고요? 다시 한번 주목하십시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암초 위에 선 아이아스가 신들을 비웃자 포세이돈이 분노합니다. 삼지창으로 암초를 박살냈고, 아이아스는 끝내 바다에 빠져 길지 않은 삶을 마치고 말지요. 스물세 살 어린 선수가 잘못되길 바라는 게 아닙니다. 그 선수는 지금 우루과이에서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지요. 하지만 명예는 쉬이 잊혀져도 허물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 전의 활약만으로도 이미 영웅이 돼 있던 그 선수는 평생 그 일을 멍에처럼 짊어져야 할 겁니다. 원조 격인 마라도나한테서 24년 넘도록 ‘신의 손’이란 오명이 떠나지 않고 있듯 말이지요.

아이아스는 죽었지만 아테나는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아이아스의 고국 로크리스에 온갖 질병을 퍼뜨리지요. 로크리스인들은 여신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무려 천년 동안이나 매년 처녀 두 명을 아테나 신전에 보내 봉사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에 대한 원망도 오래 갔겠지요. 잊지 마십시오. 평생 짊어져야 할 멍에를 처음부터 만들지 마십시오. 우연이겠지만 그 선수의 소속팀 이름인 아약스(Ajax)는 아이아스를 로마식으로 읽은 것입니다.

이훈범 중앙일보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