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터울에도 반상에선 친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1면

두 사람이 가까워진 것은 劉사범 등이 주도하는 청년 프로기사 모임 '소소회(笑笑會)'를 金교수가 후원하면서부터. 그 인연이 8년이나 계속 이어졌다. 한 세대의 연령차를 뛰어넘어 한달에 한두번씩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는 두사람. 지난 4월엔 아마추어를 대상으로 한 묘수풀이 책까지 함께 냈다.

'백이 단기필마로 풍차에 돌진하는 돈키호테의 만용을 부려 ②로 흑의 연결을 차단하면 흑은 ③으로 끊어 백을 자충의 늪에 빠뜨리겠다는 조명탄을 쏘아올려 밤하늘을 수놓는다. …'(51쪽)

'흑이 젖히면 궁도가 좁아져 백은 귀에서 옥체를 보존할 수 없다. …흑이 포위망을 보강하면 백은 눈모양을 갖추고 무릉도원에서 동남동녀의 시중을 받고 청풍명월을 벗삼아 소주잔을 기울이며….'(83쪽)

바둑책 같기는 한데 문체가 파격이다.무협지나 만담 같기도 하다.

지난 4월 책방에 나와 애기가(愛棋家)들의 관심을 끈 『실전에 자주 나타나는 사활』 (다산출판사刊·1만원)이란 묘수풀이 책이다.

더욱 이채로운 것은 회계학 권위인 초로의 교수와 세계 정상급 프로기사가 공동 저술했다는 점이었다. 주인공은 서울대 경영대의 김성기(金星基·60)교수와 4대 국제 기전(棋戰)을 석권해 세계 처음 바둑 그랜드 슬램의 위업을 이룬 유창혁(劉昌赫·36)9단이다.

그러면 金교수도 상당한 바둑 고수일 법한데….

劉사범과 대여섯점을 놔야 승부가 된다니까 아마추어 3단쯤 될까. 그런 그가 전문가의 영역에 속하는 바둑 사활집을 펴낼 욕심을 어떻게 냈을까.

"평소 시중에 나와 있는 바둑책이 너무 딱딱하고 재미없다는 생각을 자주 했지요. 우리 프로바둑이 세계를 제패했지만 1천만명이 넘는 하수 아마추어들이 친숙하고 쉽게 바둑이론을 배울 만한 교과서가 하나쯤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빡빡한 대국 일정 때문에 도저히 시간을 못내겠다는 劉사범을 3년간 설득해 그의 동조를 얻어냈다. 金교수는 평소 자신의 대마가 함몰된 경험을 중심으로 사활문제를 풀었다. 아마추어의 실전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해설은 철저하게 劉사범의 감수를 받았지만 독자가 지루하지 않도록 맛깔스럽게 집필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金교수는 1994년 중국 출장길에 진로배 한·중·일 국가 바둑대항전에 출전하려고 베이징에 온 劉사범을 우연한 자리에서 만났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가까워진 것은 劉사범과 최규병9단 등이 주도하는 청년 프로기사 모임 '소소회(笑笑會)'를 金교수가 후원하면서부터다.

金교수는 당시 젊은 프로들이 점심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생활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평소 알고 지내는 재계 기업경영자들에게서 연간 수천만원의 지원을 얻어냈다.

SK·삼성 등 대기업 연수원에서 60여명의 회원이 1년에 서너차례 바둑 관련 세미나를 열 수 있게 배려한 것도 그가 힘쓴 덕분이다.

서봉수 9단 같은 프로기사는 "金교수와 일부 대기업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우리 신예기사들이 요즘처럼 국위를 선양할 정도로 성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劉사범은 "젊은 기사를 발벗고 도와준다는 점뿐 아니라 '괴짜'라는 별명처럼 털털하고 넉넉한 성품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한 세대의 연령차를 뛰어넘어 한달에 한두번씩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는 절친한 친구사이가 됐다.

金교수의 제자들은 그가 '바둑에 한눈파는 선생님'으로 비춰질까봐 걱정한다. 그에게 배운 이태희 국민대 교수는 "회계를 단순한 부기 정도로 생각했던 80년대 초반 우리나라 회계학의 초석을 세운 분"이라고 평했다.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5년간 조교수를 지내다 82년 모교에 부임할 때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서울대 인문·사회과학 계통에서 부교수 직위로 신규 채용된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저서 『현대 중급 회계』는 90년대 중반까지 10년 넘게 이 분야의 대학 교과서로 큰 인기를 얻었다.

바둑과 학문이 통하는 점은 무엇일까.

"바둑을 정석에 맞게 둬야 한다고 하지만 실전에선 감각에 의존해야 할 때가 많아요. 학문은 논리를 바탕으로 해야 하지만 직관적 부분도 꼭 필요합니다."

그는 회계를 바둑의 복기(復棋)에 비유하기도 했다. 복기를 게을리하면 바둑이 잘 늘지 않는 것처럼 회계가 부실하면 기업의 경영성과를 제대로 높일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늘 되새긴다는 이야기였다.

홍승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