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공무술 창시자 장수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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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차지철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축지법을 쓰고 장풍을 쏜다"고 보고했던 무림의 고수 장수옥(張水玉·55)씨. 10·26 직전 그러니까 1979년 6월 그는 청와대 연무관에서 朴전대통령에게 그가 창시한 무예인 '특공무술' 시범을 보였다.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고 경호실장에게 "이 좋은 무술을 전군에 보급시켜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1년후 張씨의 무술은 청화대 경호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술기가 되었고 특전사 등으로 보급되었다. 이 무림의 고수가 청와대에 입성한 것은 전두환씨가 대통령에 취임한(1980년 9월 1일) 지 달포 뒤인 10월 15일이었다. 이후 장수옥은 全씨의 지시로 청와대 경호관(4급직)으로 채용됐다. 그 후 22년 동안 그는 네명의 대통령을 경호하는 경호원들의 사부가 됐다. 朴전대통령에게 시범을 보인 인연까지를 생각하면 다섯 대통령이다.

그가 지난 3월 31일 홀연히 사범복을 벗었다. 그러고는 지난달 30일 파란만장한 삶을 담은 자서전(『대통령 경호원들의 영원한 사부』·태일출판사)을 냈다. 구절구절 한 풍운아의 삶의 냄새가 푹푹 풍긴다. 자서전에 담지 못했던 숨은 얘기들이 왜 없겠는가.궁금증을 안고 서울 종로구 구기터널 부근 신영동 대한특공무술협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대뜸 속물적인 질문부터 던졌다.

-진짜 장풍 씁니까? 또 축지법도 하신다던데….

장수옥은 날아갈 듯한 검은 눈썹 사이에 콧매가 날렵해서 인상이 여간 매섭지 않았다. 게다가 눈길을 피하지 않는 실눈과 과묵한 입에서 망치지르듯 툭툭 내던지는 듯한 말씨가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느끼게 했다.

"장풍을 쓴다는 건 과장된 말입니다. 실은 평수(平水·손바닥을 쫙 펴서 상대방의 급소나 혈을 내공의 기로써 타격하는 술기)법입니다. 제대로 하면 상대의 갈비뼈가 나가고 생명도 위험합니다. 축지법은 차지철씨가 대통령 앞에서 시범자리를 만들려고 얘기를 드라마틱하게 한 겁니다. 아마도 제가 고축차기 스냅을 하는 걸 보고 그랬는지 모릅니다. 발을 위로 뻗어 틀어서 움직이는 동작이거든요. 벽을 타고 뛰어올라 천장에 붙어 차고 내려오는 거니까 축지법처럼 보였을 겁니다."

여러가지 격투기 장점 모아

-특공무술이 어떤 건지.

"박정희 정권 말기에 북한 군인 한명이 잡혔는데, 그는 격술이란 무술로 단련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무술은 태권도나 유도 등 당시 군에 보급된 무예론 꺾을 수 없는 강력한 전투무술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배운 여러 격투기에서 장점들을 따 전투에 적합한 무술로 만들었습니다. 말하자면 북한의 격술을 이길 수 있는 실전적인 무예지요. 차지철씨가 이름을 특공무술이라 지어줬습니다. 외공의 빠른 속도감과 내공의 힘이 하나의 동작에서 합쳐져 큰 공격력을 발휘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특공무술은 대통령 경호실 및 예하부대가 모두 배우는 무술로 발전했으며 전국적으로 약 50만명이 이 무술을 배웠습니다."

딸과 아들이 있다던데, 이들도 무예인이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우리는 이때쯤 자리를 옮겨 구기동 장수옥의 자택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우선 둘째인 아들 은석(恩碩·26)씨가 어디 갔느냐고 묻자 장수옥의 부인인 김단화(金丹和·54)씨의 말. "월드컵 하고 나서 얼굴 볼 틈이 없어요. 밤새도록 대한민국을 외치고 다니면서 응원한답니다. 원 참. 그러곤 새벽에 들어와선 하루종일 낮잠입니다." 단국대 영문학과 4학년인 아들도 피가 꿈틀거리고 열정이 들끓는 것은 아버지를 닮았나 보다. 맏딸 지경(智鏡·28·출가)씨는 영어학원 강사를 한단다. 어째서 무예를 하는 자식이 없느냐는 물음에, "그거 춥고 배고파요. 자식에게 누가 그걸 시키고 싶겠어요?" 하며 張씨는 웃는다.

전재만·노소영씨도 가르쳐

이번에는 청와대 얘기가 듣고싶어졌다.

-아마도 경호원들 사이엔 호랑이 사부님이셨을 것 같은데….

"집에서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 대통령이 어딘가를 순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 저는 요원들을 살핍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뭔가 딴 생각을 하고 있거나, 목에 힘이 들어가 있는 친구가 있지요. 제 눈은 못 속이거든요. 전화를 해서 호통을 칩니다."

-대통령들 얘기를 좀 해주시죠.

"제가 모신 대통령 중에선 전두환씨가 가장 잔정이 많고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분은 경호원들 이름을 일일이 다 기억했지요."

-막내아들 전재만씨의 사부이기도 하셨다던데….

"이런 일이 있었지요. 자유대련을 하던 재만씨가 보조요원의 뒤차기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이때 뒤에서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재만아! 빨리 일어나! 임마, 넘어졌으면 바로 일어나서 공격을 해야지 그게 뭐야?' 쩌렁쩌렁한 아버지의 목소리에 재만씨는 겨우 일어나 다시 대련 자세를 취했지요. 그러자 全씨는 '張사범, 또 한번 시켜!'라고 말했습니다."

全씨의 행적이 남긴 역사적 얼룩을 기억하는 나로선 이런 얘기를 듣는 일이 낯설었다. 그러나 측근에서 모셨던 한 사람에게 감화를 주는 일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일이라 말을 끊는 것도 유난을 떠는 일이리라. 張씨 부부는 전두환씨가 백담사로 가있던 무렵 살을 에는 겨울저녁에 그를 찾아가기도 했다. 노태우씨의 큰딸 노소영씨도 張씨의 무술지도를 받았다. 그녀는 장수옥의 생일을 기억했다가 케이크를 사서 들고온 일도 있었다.

-김영삼씨나 김대중 대통령과의 에피소드는 없나요.

"김영삼씨 때부터는 문민정부였으니까 아무래도 경호 쪽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았어요. 무술 시범을 본 뒤 김영삼씨의 첫마디는 '무섭다'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시범이 끝나자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여러분들이 퇴직을 하고 내가 임기를 끝내고 나갔을 때도 여러분들이 나와 함께 근무한 것이 보람있었다는 것이 역사에 남도록 열심히 하겠어요."

대통령의 얘기가 나오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잠깐 장수옥은 입을 다물었다. 곧 다른 얘기로 이어졌지만 張씨의 머리 속엔 金대통령의 저 말이 맴돌고 있었을까?

"사실, 요즘 게이트다 뭐다 해서 좀 어수선한데 그러면 아무래도 경호 임무도 영향을 받게 될까 걱정이 되지요. 저는 제자들의 그런 동정을 파악하고, 훈련 중에 축구를 시키기도 하고 그러지요." 장수옥의 이 말엔 그들만의 고뇌가 얼핏 내비쳤다.

장수옥은 20여년 동안 공직생활을 하면서 한번도 바람을 타지 않았다.

"전 무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줄도 돈도 없습니다. 제가 청와대에 근무한다고 청탁하는 사람들이야 왜 없었겠습니까. 나는 제 아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런 부탁이나 강청(强請)이 있을 때마다 일언지하에 거절을 해서 다 물리쳤다는 사실입니다. 뒷돈이 난무하고 제자리를 안 지키는 사람이 많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원칙대로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무예인이기 이전에 그는 가장 아름다운 공직자였다 싶다.

각종 청탁 아내가 물리쳐

-어떻게 해서 무술에 입문했는지.

"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지요. 초등학교 시절 겨울에 교사(校舍)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을, 날아올라 발로 차 떨어뜨렸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야바위꾼들에게 돈을 빼앗겼는데, 그게 억울해 태권도 도장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조금 해보니 시시했어요. 그래서 다시 합기도를 배웠지요. 길을 가다 깡패들을 만나면 서너명 정도는 딱 세번의 동작으로 물리쳤지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는 철공소의 한쪽 귀퉁이를 막아 합기도 체육관을 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도장은 무문관(無門館)으로 이전개업해 특공무술이 태동하는 산실이 된다.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이 넘었다. 무려 네시간이 흘렀다. 마무리 질문을 해야 했다. "이제 어떤 일을 할 생각이냐"고.

"무림원을 하나 세우고 싶습니다.특공무술을 위한 사업이 아니라, 모든 무예의 산실이자 종합적인 훈련원 구실을 하는 곳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요즘은 골프니 구기운동이니 하는 것들은 발전하고 있지만, 무예는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의 젊은이를 기르기 위해선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이상국,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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