健保 장기정책 겉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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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달에 1백50만원의 항암치료비를 부담하고 있다. 이 돈 때문에 남편이 수입을 늘리기 위해 일자리를 바꾸기도 했다. 정부가 본인부담금을 절반으로 낮춘다고 해 잔뜩 기대해왔는데 도대체 언제 시행하는 거냐."

20일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국립암센터를 찾은 폐암환자 이주희(34·여)씨는 "과도한 본인부담금 때문에 생활이 너무 힘들다"면서 "정부가 하루 빨리 약속을 이행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해 3월 건보 재정이 파탄나자 5월에 건보재정 안정화 대책을 발표하면서 "2002년 3월께부터 중증 질환자의 본인부담금을 줄여 건강보험 본연의 기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李씨의 하소연대로 이 정책은 아직 시행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건강보험의 틀을 바꿔 재정을 안정시키고 보험의 역할을 정상화하기 위해 발표했던 각종 장기 대책이 표류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민간 건강보험과 총액예산제 도입, 중증 질환자의 본인부담금 경감, 건강보험증 전자카드화, 의약품 유통개혁 등의 대책에 대해 검토 작업을 중단했거나 거의 진척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정책이 겉도는 이유는 지난 1월 말 이태복 장관이 새로 취임하면서 정책의 방향이 달라졌고, 일부 대책은 원래 실현 가능성이 작은 데도 발표용으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복지부의 한 관계자는 "장관이 교체되면서 전 장관이 내놓았던 대책이 힘을 잃고 있다"며 "시민단체나 의·약계 등의 반대가 만만치 않아 정책을 추진하기가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복지부는 지난해 12월 민간건강보험 대책반을 구성해 본인부담금과 비(非)보험 진료비를 사(私)보험에 맡기는 안을 마련했으나 이후 공청회 개최 등 후속 작업을 하지 않고 있다.

의료기관이나 약국의 부당청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전자 보험카드를 도입하겠다며 두 차례 사업설명회까지 했으나 올해 초 관련 법안이 통과되면서 국회에서 근거 조항이 삭제돼 사업이 중단됐다.

건강보험공단이 의료기관과 연간 진료비를 총액으로 계약해 이 안에서만 돈을 지급하는 제도인 총액예산제처럼 최근에서야 자료 검토 작업에 들어간 사업도 있다.

반면 최근 복지부는 보험 약값 인하에 전력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약국들의 반발을 사거나 규제개혁위원회가 제동을 걸기도 했다.

성균관대 의대 김병익 교수는 "약값 인하도 중요하지만 건강보험의 틀을 어떻게 손볼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작업이 더 절실하다"고 말했다.

보건사회연구원 조재국 보건의료연구실장은 "새 정부가 들어선 뒤 건보 틀을 본격적으로 개혁할 수 있도록 지금은 장기대책의 기초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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