主婦 거리응원단 독해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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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6위의 이탈리아를 제치고 '꿈의 8강'에 진출한 벅찬 감격을 나누기엔 하룻밤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이튿날 아침 출근길을 서두르는 차량의 물결을 끊으며 '승리의 자동차'들은 무리를 지어 거리를 누볐다. 차량 지붕 위로 몸을 곧추세운 여성들은 승리의 여신처럼 태극기를 휘날렸다. 차도만이 아니었다.

76세 할머니도 목청 높여

가게 문을 열 준비를 서두르는 나이 지긋한 여주인도 붉은 옷차림이긴 마찬가지였다.

하기야 어디 이들뿐인가. 건국 이래 최대 인파인 4백15만명이 길거리 응원에 나섰다는 18일 밤, 여성들의 열기는 하늘을 찔렀다. 55만명이 모였다는 시청앞 광장에서는 게임을 앞두고 응원전을 펼치던 붉은 악마 리더가 "자, 이제 여성들만" 할 때마다 좀 전의 함성이 무색할 정도로 여성들은 소리높여 '대~한민국'을 외쳤다.

응원에 목청을 돋우던 76세 할머니는 "정말 신이 난다"고 말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이모를 모시고 왔다는 50대 조카 부부, 직장에서 함께 어울려 나왔다는 중년여성들, 대학생 딸이 티셔츠를 사주며 함께 가자고 해 따라 나왔다는 40대 어머니, 모처럼 남편과 '시청앞 데이트' 중이라는 흰 머리의 아내, 온 가족이 함께 왔다는 30대 주부…. 혈기 왕성한 10대와 20대의 넘치는 에너지를 따라잡기엔 힘겨웠지만 그들 또한 질세라 손바닥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짝짝 짝짝 짝' 박수를 쳐댔다.

"정말 여자들 대단해요."

남자들이 혀를 내두르며 하는 말 속엔 '언제부터 여자들이 그렇게 축구광이 됐나?'하는 의아함이 역력했다. 하기야 대입시를 코앞에 둔 고3 여름방학에도 책가방을 학교 도서관에 던져버리고 동대문 운동장으로 직행해 두 게임씩 실업야구팀 경기를 보느라 엉덩이에 땀띠까지 났던 나도 축구장행은 지금까지 열 손가락을 채우기도 어려우니 스포츠라면 고개를 돌리는 뭇 여성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터. 그런데 요즘 월드컵 게임을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직성이 안풀려 거리엔 여성들이 넘쳐나고, 시간이 흐를수록 중년·노년 여성들까지 붉은 티셔츠를 차려 입고 집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이것이 천지개벽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유를 궁금해하는 내게 페미니스트 저널 IF의 발행인인 박옥희씨는 "행복 바이러스가 주부들에게 전염돼 축구로 다가간 것"이라고 풀이했다. 정치건, 살림살이건 무엇하나 신이 날 것 없는 주부들에게 축구의 승리가 남편을,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보며 자신도 행복함을 맛보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거리에서의 행복 추구'일까. 거리응원에서 만난 중년 여성들은 "젊음의 열기가 좋아서"라고 입을 모았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뜨거운 정열을 지닌 우리 민족이지만 유독 이 땅의 어머니에게만은 엄격한 인습의 굴레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만큼 안으로 곰삭혀야만 할 그들의 정열을 생각하니 그럴 법도 했다. 폴란드전이 열릴 때만 해도 젊은이들의 전유물이었지만 계속 늘어나는 인파 덕에 즉석기념사진 촬영사까지 등장할 정도로 거리가 축제의 장이 됐으니 어머니들도 더 이상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건가.

안방서 못느낀 색다른 재미

안방에서는 결코 만끽할 수 없는 색다른 재미가 주부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대도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모를 뿐 아니라 남의 행동을 눈여겨 보는 사람조차 없다는 군중의 익명성이 주는 자유로움에 안도하며 붉은 옷을 입었다는 사실만으로 세대를 뛰어넘게 해주는 일체감 속에서 열광적인 젊은이들과 뒤섞여 근육질의 남성들이 제공하는 짜릿한 승부를 마음놓고 환호하는 재미. 이 속에서 주부들은 아내나 어머니를 털어버리고 오직 한 사람의 열정적인 여성으로 환생해 '대~한민국'을 외치고 있다. 게임의 승패도, 동반자와도 상관없이 모처럼 맛보는 자신만의 '심리적 해방'을 만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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