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내가 보고싶은 것' 을 그린다<이성강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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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7면

애니메이션 '마리 이야기'를 만든 이성강(41)감독은 말이 별로 없다. 보통 묻는 말에만 짧게 대답한다.

그런 이감독에게도 '마리 이야기'의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대상 수상은 예삿일이 아니었나보다. 어떤 질문을 해도 얘기가 술술 나왔다. 그것도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이감독을 축하하기 위해 세종대 만화 애니메이션학과 2학년 서유정(23)·김지영(19)양이 지난 14일 부푼 가슴을 안고 신촌 작업실로 찾아갔다. 특히 다른 대학에서 패션 디자인을 3년간 공부하다 다시 입학한 서양은 과내 애니메이션 제작 동아리 '무쌍'의 '짱'(대표)으로서, 뭔가 '비법'을 얻어가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대단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날은 작업실이 이사하는 날이었다. 전승일(37·동국대 교수)감독팀과 한 팀을 이뤄 26부작 TV 시리즈와 HD-TV용 3부작을 구상하고 있다는 이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다카하다 이사오 콤비 감독의 지브리 스튜디오('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만든 그 곳!)를 능가해보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작업실 옆 카페에서 기다리던 '꿈나무'들에게 이감독은 자상한 오빠이자 이미 커다란 족적을 남긴 작가였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논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었던 것은 그래서 행운이었다.

서유정=이름이 불릴 때 어떠셨어요.

이성강=아무 언질도 없었기 때문에 정말 얼떨떨했어요. 기대작이었던 일본 작품 '메트로폴리스'의 반응이 저조했기 때문에 솔직히 기대를 좀 하긴 했었지만.

김지영=외국인들 반응이 궁금해요.

이=심사위원 얘기가 휴머니티가 넘치고, 자연도 아름답게 묘사했고, 독특한 상상력도 돋보였대요. 한 프랑스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더니 "옛날 생각이 난다"며 눈시울을 훔치더라고. 감독으로선 기분 좋았지.

서=국내 개봉 땐 지루하다는 반응도 많았잖아요.

이=흥행을 목적으로 한 애니메이션에는 어떤 공식이 있어요. 난 그 공식 말고 내식대로 작품을 풀어보고 싶어요. '왜 팬터지가 팬태스틱하지 않은가'하고 묻는 사람도 있는데, 내 영화에서 환상은 모험이 아니라 한 사람의 머릿속을 얼핏 스쳐가는 생각 한조각이에요.

김=상금은 얼마예요.

이=없대요. 그냥 명예지, 뭐.

이감독은 연세대 심리학과(81학번)를 졸업한 뒤 그림·판화 작업 등을 해오다 95년부터 컴퓨터 애니메이션에 몰입했다.'토르소''두 개의 방''넋'(이상 95년)'연인'(96)'우산'(97)'덤불 속의 재'(98) 등 11편의 단편을 제작해오다 이번에 첫 장편인 '마리이야기'를 만들었다.

서=심리학과 출신이 어떻게 애니메이션 감독이 됐나요.

이=원래 그림이 좋았어요. 졸업하고 미술운동도 좀 했고. 그러다 어느 날 컴퓨터를 써봤는데, 그림이 움직이는거야. 재미도 있고 반응도 좋더라고. 애니메이션은 미술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냐. 영화지. 여건이 되면 영화도 만들고 싶어요.

김=단편과 장편은 뭐가 다른가요.

이=여러 사람이 함께 한다는 것이지요. 각각의 개성을 한데로 모으는 것. 그리고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겠지. 해봐서 알겠지만 책상 앞에 앉아서 보내는 고통의 시간을 더 많이 인내해야 한다는 점도 특징이랄까.

김=어떤 작품을 추구하시는데요.

이=내가 보고 싶은 작품. 관객들이 원하는 것은 그 다음이죠.

서=그럼 흥행성이 떨어지잖아요.

이=돈을 벌기 위해 작품을 만들면 안된다고 생각해. 돈을 벌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거죠. 내가 보고 싶은 작품을 관객들도 보고 싶을 때, 흥행은 성공하는 거니까.

김=단편작가를 할 때 작품 만들며 사는게 힘들지 않으셨어요.

이=만화 아르바이트 작업을 두 달 정도 하면 1천만원 정도 생겨요. 그걸로 1년 살았지. 열달 동안 작업하면서.

서=제작비가 30억원 가까이 들었다고 하는데, 자금은 어떻게 조달하셨나요?

이=복이 많은 것 같아. 장편 만든다는 소리를 듣고 투자사에서 찾아왔어요. 결과적으로 돈에 신경 안쓰고 작품에만 몰입할 수 있었지. 좋은 프로듀서를 만나서 그랬던 것 같아요.

옆에서 얘기를 듣던 전감독이 거들었다. "사전에 준비를 얼마나 꼼꼼하게 하는데. 아직 계획도 발표하지 않은 실사영화 시나리오도 이미 퇴고를 아홉번이나 봤다고. 다음 장편도 기본안과 기본 캐릭터는 이미 완성돼 있고요. 달랑 기획서만 들이대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달라요."

김=좋아하는 감독은 누구세요.

이='아버지와 딸'을 만든 마이클 두독 드위트. 난 그 작품 세번 보면서 세번 다 울었어.

서=어떤 작품을 만들고 싶으세요.

이=예술의 기본은 애매모호함에 있다고 생각해요. 뭔가 알 수 없는 무엇. 그것을 통해 관객들이 저마다 생각하고 해석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작품.

김=저희 같은 신세대에게 해줄 말은.

이='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을때, 한번 더 하세요. 그러면 정말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자기가 하는 일에서 재미를 느껴보세요.

서=재미는 누구나 느낄 수 있지만 미치기는 어렵다고 하던데요.

이=글쎄, 재미있으면 미치지 않을까.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면서 학생들에게 소감을 물었다.

"저는 그래도 상업성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작가주의는 다음이죠.아무리 잘만들어도 사람들이 봐주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김지영)

"흥행에 성공할 수 있으면서도 자기 목소리를 담은 작품을 만들기가 정말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꼭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서유정)

큰 나무 사이를 걸어가면 내 키도 커진다고 했던가. 많은 꿈나무들이 쑥쑥 자라나기를 기다려본다.

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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