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나이의 충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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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980년대 말 미국 학계에선 '미국 쇠퇴론'이 유행했다.예일대 역사학 교수인 폴 케네디는 『강대국의 흥망』이란 책에서 과거 스페인과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도 과다한 군사력 유지로 인한 '제국의 과도팽창'으로 쇠퇴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때 미국 쇠퇴론에 강한 반론을 제기한 사람이 정치학자 조셉 나이다. 하버드대 교수로 국방차관보를 역임한 나이는 『지도할 책임』이라는 책에서 미국의 힘은 쇠퇴하지 않았으며, 21세기에도 세계를 리드해 나갈 것이라고 장담했다. 나이는 한 나라가 갖는 힘을 군사력·경제력 등 하드 파워와 이념·제도·문화·과학기술 등 소프트 파워로 나누고, 미국은 두 가지 모두에서 지구상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이 막강하다고 주장했다.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 상황에서 판단하면 나이의 주장이 옳았다고 봐야 한다. 미국의 힘은 쇠퇴하기는커녕 더 강해졌다. 군사비 지출에서 미국은 미국 다음 순위인 8개국의 군사비를 합한 것보다 많다. 경제력은 세계 총생산의 31%를 차지해 미국 다음 순위인 4개국 총생산을 합한 것과 같다. 문화적 우월성에서도 단연 앞선다. 미국은 영화와 TV 프로그램 수출에서 세계 제일이며, 외국 유학생들을 가장 많이 받아들이는 나라다.

나이는 최근 발간된 『미국 파워의 역설』에서 자신의 주장을 수정·보완했다. 지구정보시대에는 국가의 힘도 3차원 체스 게임처럼 복잡해졌다고 지적하면서 국가의 힘을 체스판의 상·중·하부로 나눠 상부를 군사력, 중부를 경제력, 하부를 초국가적 영역으로 나눴다. 현재 미국은 상부에서 단극(單極) 위치에 있으나, 중부에선 유럽·일본·중국과 함께 다극(多極) 위치에 있다. 하부에선 힘의 분산이 일어나고 있어 종래의 단·다극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미국의 힘에 대한 도전이 바로 하부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나이는 본다. 자본·기술·정보의 세계적 확산으로 정부의 힘은 약해진 반면 다국적기업·비정부기구(NGO)·개인의 힘은 강해졌다. 이들은 독자적 소프트 파워를 갖추고 국제정치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같은 상황에 필요한 외교는 다자주의(多者主義)라고 나이는 지적한다. 군사력이 아무리 막강해도 일방주의(一方主義)로는 미국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 외교에는 다자주의와 일방주의 양자(者)의 합리적 조화가 필요하다고 나이는 충고한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일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미국의 외교전략을 종래의 억지와 봉쇄에서 필요하면 선제공격도 불사하는 적극 개입으로 전환한다고 선언했다. 그동안 유지돼 온 국제질서의 기본 틀을 깰지도 모를 극단적 일방주의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외교정책 입안자들은 나이의 충고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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