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어지간히 하실 분들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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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국내 인맥이 달릴 텐데, 사회생활에 핸디캡은 안 되나요?”

답변은 망설임 없이 나왔다. “거기선 외국인 친구를 많이 사귈 수 있습니다. 사회생활에 국내 인맥이 얼마나 필요한지 잘 모르겠지만, 국제적인 교우관계에 만족합니다.”

다른 학부모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가늠할 길은 없다.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으로 생각할지, 아니면 현실적 질문에 물정 모르는 답변이라고 볼지 말이다. 어쨌든 그런 질문이 나온 건 엄연한 현실의 반영이다. 연고주의에 대해 겉으론 다들 부정적이면서, 자기 학교나 고향은 애틋하게 챙기는 게 우리의 정서다. 대학물 먹은 지성인들도 별 차이 없다. 특히 이번 정권에선 대통령이 나온 대학의 위상이 급부상하면서 안 그래도 강한 그 졸업생들의 연대감이 더욱 다져지는 모습이다.

또 어디에나 지연으로 엮인 무슨 무슨 ‘회’라는 게 꼭 있다. 단순한 친목모임에 그치질 않는다. 때론 집단화하고 세력화해 사익을 좇는다. 혹시 같은 지역에서 높은 분이라도 나오면 엄청난 응집력과 행동력을 보인다. 그런 인맥에 발을 담그지 못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아웃이다.

현실이 이러니 지명도가 낮은 일본의 대학에 유학 가려는 자녀가 학부모의 눈엔 안쓰러울 수밖에. 마치 집단안보체제에서 홀로 떨어져 나오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요즘 인사판 돌아가는 걸 보면 그런 시각이 잘못됐다고 할 수가 없다. 인사는 중요한 정치적 분배 행위다. 그래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 실세나 그 주변 인물 중심의 인사 잔치가 벌어진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물 좋을 때’ 요직을 차지하려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게 늘 도를 넘는다. 갈 자리, 안 갈 자리, 가리지 않고 연고주의로 독식하는 게 관행이 돼버렸다. 외부 수혈은 외면하고 한정된 인사 풀 안에서 돌리고 또 돌린다. 공직도 모자라 대형 금융사에서 소형 증권사 대표 자리까지 알뜰하게도 챙겨 간다. 공직엔 뭔가 걸리는 게 있어 쓰기 어렵자 굵직한 민간기업에 자리를 배려해 주고, 요직에 불러 쓰다가 곧 갈아치우고 외국으로 대접해 내보낸 뒤 훨씬 더 중요한 자리에 다시 불러들이고, 각료급으로 발탁했다가 1년 만에 경질한 뒤 주요 공공기관장으로 선임하고, 공기업 회장직에서 밀어냈다가 청와대 요직으로 부르고, 공기업 계열사에서 연봉 많이 주는 민간 금융사 사장으로 옮겨 주고….

이런 인사의 이득, 일차적으론 당사자와 그 주변이 누린다. 반면 그 피해, 나중에 여러 사람들에게 조금씩 골고루 돌아간다. 낙진 떨어지듯 말이다. 이익의 집중과 피해의 분산이다. 그 집중적 이득을 위해 소수가 목소리를 내고, 뭉치고, 몰려다니고, 행동하는 거다. 자기 편 전체에 돌아올 부담은 뒷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 피를 수혈하고, 바람구멍을 트려면, 뭔가 큰 지각변동이 필요해진다. 그럴 때마다 사회적 마찰은 커진다. 이것도 큰 비용이다. 결국 사회 전체의 효율은 떨어지기만 한다. 하기야 이번 정권만 그런가. 2004년 5월 정찬용 당시 청와대 인사수석은 공기업 인사를 앞두고 이런 말을 했다.

“어지간히 하신 분들은 스스로 거취를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대로라면 다음에 어느 정권이 들어서건 이런 말이 또 나오게 생겼다. 어지간히 하실 분들, 처신에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남윤호 경제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