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연극계 代母 백성희씨 공로만큼 제대로 대접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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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백성희(77)라는 여배우가 있다. 남자 배우인 장민호씨와 함께 국립극단의 원로배우를 대표한다. 웬만한 연극 선진국에서 국립극단 배우는 엄청난 영광의 자리다. 그래서 사후에도 칭송의 대상이 되곤 한다. 20세기 영국 연극의 지존(至尊)이었던 존 길구드·로렌스 올리비에 등은 그런 예로 꼽을 만하다.

백씨는 경력으로 보나 연기력으로 보나 그들 못지 않은 '한국 연극의 어머니'다. 뒷세대들인 박정자·손숙·윤소정·윤석화 등이 1980~90년대 대중매체의 조명 덕에 스타로 각광받을 때에도 백씨는 국립극단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인기의 마력을 모를 리 없지만 그녀는 "원칙과 기본에 충실한 배우의 본분을 다하겠다"며 제자리를 지켰다.

만년 주인공이었던 백씨에게도 세월은 불가항력이었다. 그래서 최근엔 단역·조역 출연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역할이 무엇이건 백씨가 출연한 연극과 그렇지 않은 연극은 맛에서 차이가 났다. 그녀의 카리스마가 발광(發光)하지 않은 작품은 김빠진 맥주처럼 밍밍하기 일쑤였다.

'명배우' 백씨의 연기가 요즘 일본 연극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백씨가 '한국의 어머니'로 출연한 한·일 합작극 '강 건너 저편에'(일본 신국립극장 소극장에서 13일 공연)가 그녀의 출중한 연기 덕에 일본 평단에서 발군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아사히신문은 "속마음(혼네·本音)을 다져넣은 새로운 지평"이라고 평하며 그 일등공신이 바로 백씨임을 상기시켰다. 한달여의 연습기간 중 일본 신국립극장 스태프들은 남에 대한 그의 배려와 철저한 자기관리에 감복해 "백씨야말로 참배우"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백씨도 한국에서는 '수모'를 당하니 안타깝다. 백씨는 최근 몇년간 꾸준히 예술원의 새 멤버로 이름이 거론되는데, 번번이 좌절하고 있다. 자격이나 업적으로 보면 결코 기존 회원 못지 않은데도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젊은 시절 백씨가 악극 등 대중극에 출연했기 때문"이라는 게 연극계의 유력한 설(說)이다. 한마디로 백씨는 신극(新劇) 위주로 자기사람을 챙기는 연극계의 오랜 '파벌주의'의 희생양인 셈이다.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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