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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돈 10弗에 깔끔한 잠자리·인터넷까지 월드컵 배낭族 명소 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월드컵 경기를 보기 위해 지난달 29일 입국한 미국인 대학생 도로신(26·오클랜드대)은 8일 오전 10시가 돼서야 겨우 눈을 떴다. 전날 밤 남미(南美) 친구들과 TV로 월드컵 하이라이트를 보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다 새벽녘에야 눈을 붙였기 때문이다.

그는 샤워를 한 뒤 로비에 있는 컴퓨터로 여자 친구와 할아버지에게서 온 e-메일을 확인하고 월드컵 소식을 적어 보냈다. 그리고 휴게실에서 무료로 건네받은 서울 지도를 펴 놓고 오후 관광 계획을 짰다.

도로신이 열흘이 넘도록 편안하게 머물면서 월드컵 축제를 즐기고 있는 이곳은 서울 을지로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배낭여행자 합숙소)인 '트래블러스 A'. 지난해 같은 대학 친구가 "서울에 정말 근사한 곳이 있다"며 추천해 준 곳이다.

도로신은 "프랑스와 우루과이의 경기를 보기 위해 6일 부산에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왔다"며 "미국이 한국과 싸우는 대구로 바로 갈 수도 있었지만 여러가지로 편한 이곳에 머물며 관광을 즐기다 대회 당일 대구로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트래블러스 A는 내국인보다 외국 배낭족들에게 훨씬 잘 알려진 서울의 명소다.

전세계 배낭여행객들의 단골 사이트인 '론리 플래닛'은 "저렴한 가격(1인당 1박 1만2천원)에 깔끔하고 편리한 시설을 갖춘 서울의 명소"라고 이곳을 소개하고 있고 일본의 여행 잡지들도 특집으로 여러 차례 다뤘다.

4층 건물에 20여개의 객실을 갖춘 이곳의 명물은 20여명이 함께 할 수 있는 대형 휴게실. 세계 각국의 배낭족들이 여행 중 겪은 에피소드를 나누고 우정을 쌓느라 밤 늦도록 웃음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특히 축구를 사랑하는 '월드컵 배낭족'들은 새벽까지 축구 경기 재방송을 보면서 거의 매일 맥주파티도 벌인다.

월드컵 개막 후 이곳을 찾은 외국인은 1백70여명. 미국·일본에서부터 이스라엘과 불가리아 사람들까지 트래블러스 A의 숙박부에 이름을 올렸다.

요즘 투숙객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단연 우리나라의 길거리 응원문화. 한국과 폴란드의 경기가 있었던 지난 4일 온 국민이 붉은 색 옷을 입고 함께 응원하는 것을 보고 "환상적이다"를 연발하던 투숙객 40여명은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경기가 열린 7일엔 전원 광화문으로 출동해 전광판으로 경기를 지켜보며 '붉은 악마' 흉내를 내기도 했다.

이곳이 서울의 명소로 자리잡게 된 데는 대학 시절 배낭을 메고 유럽과 북미대륙을 훑고 다니던 사장 한재호(韓在鎬·32)씨의 경험과 안목이 바탕이 됐다.

韓씨는 "저렴하면서도 쾌적한 게스트 하우스가 그 나라의 인상을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배낭여행을 하면서 훌륭한 게스트 하우스를 만들겠다는 꿈을 키웠다"고 말했다.

1997년 여름 핀란드 배낭족 친구로부터 "당신 나라 숙소는 왜 한결같이 음침하고 불편하냐"는 지적을 받고 자존심이 상한 그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직장생활을 하며 모은 3천만원을 부모의 건물에 쏟아부어 단장했다.

韓씨는 건물을 개조하면서 남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하는 손님들을 위해 2인실(13개)을 충분히 마련하고 나머지 손님들을 위해선 매일 밤 가벼운 맥주파티를 열었다. 인터넷 홈페이지(www.travelersa.com)도 운영했다. 손님이 요청하면 함께 지방여행을 했고 채식주의자들을 위해 농산물시장도 자주 다녔다.

이같은 韓씨의 노력은 외국인들을 감동시켰고 여행 관련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이곳에서 일주일 묵었던 한 스페인 배낭객은 韓씨의 취미가 동전수집이라는 걸 알고 귀국 후 유럽 모든 국가의 동전 7만원어치를 모아 보내기도 했다.

깔끔한 화장실과 취사 시설에 인터넷까지 갖춘 이곳이 배낭족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방문객도 늘었고 개장 5년 만에 '만성 적자'에서 벗어날 희망도 키울 정도가 됐다.

韓씨는 "이곳을 운영해 돈을 벌 생각이었으면 벌써 그만 뒀을 것"이라며 "앞으로 한국이 세계 배낭족들이 찾고 싶어하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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