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환영의 시시각각

월드컵 우승 못 하란 법 없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공간에서 시간으로 옮겨가 보자. 미래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철학에서 현재주의(presentism)는 현재만 존재할 뿐 미래나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반대로 영원주의(eternalism)에서는 미래가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현실의 일상 생활 세계로 내려오자. 그래도 우리는 ‘미래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적어도 가끔은 목격하고 체험한다. 대한민국과 월드컵의 관계에서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앞으로 언젠가 대한민국은 월드컵 8강·4강이 아니라 우승까지도 가능하다. 사회과학자들에게 미래는 예측의 대상이다. 그러나 행동하는 비저너리(visionary)들에게 미래는 창조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들은 “미래는 예측할 수 없지만 창조할 수는 있다”(댄드리지 콜), “미래를 예측하는 최선의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피터 드러커)라는 말을 신조로 삼는다. 어쩌면 미래 창조가 미래 예측보다 더 쉽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계속 좋은 성적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계에 대해 생각하고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따지는 지정학(geopolitics)에 비견되는 지오스포츠학(geosports)적인 접근으로 세계 스포츠 역학의 변화를 준비해 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내외 환경의 분석이 필요하다. 우선 국제 환경을 따져보자. 국제사회 전체를 보면 21세기가 아시아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과 미국의 세기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맞서고 있다. 그러나 축구에 국한시켜 본다면 21세기도 유럽의 세기다. 유럽뿐만 아니라 중남미·미국·아프리카에서 우수한 선수들이 모이는 곳이 유럽 축구 무대다. 국내 축구 환경에서는 중대한 변화가 진행 중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돋보인 기성용·이청용의 활약에서 보듯, 대학 축구뿐만 아니라 클럽 축구가 우수 선수의 등용문으로 부상했다. 또한 축구를 무엇보다 개인적인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선수가 많아지고 있다는 현상에 주목할 필요가 생겼다. 결론적으로 유럽 축구 시장에 진출하고 국내 클럽 축구를 유럽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게 우리의 과제다. 국가·사회·개인이 협업하는 축구 시스템 창출도 절실해졌다.

과학이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미래를 만드는 것은 결국 국가의 정책이다. 세계에는 강한 국가도 있고 약한 국가도 있으나 우리에게는 정보기술(IT)이나 녹색경제 부문 등 특정 경제 분야의 발전을 자극할 능력이 있는 강한 국가가 있다. 세계에서 한국처럼 효과적인 산업 정책을 펼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재무장관으로서 산업 육성 정책을 편 알렉산더 해밀턴(1755~1804)으로 상징되는 산업정책의 전통이 있는 미국이지만, 미 정치학회(APSA) 회장을 지낸 피터 카젠스타인 코넬대 석좌교수에 따르면 미 행정부에는 한국형의 효과적인 산업정책을 펼 수 있는 관료집단이 형성돼 있지 않다.

축구는 산업이다. 그래서 축구에 대한 ‘산업정책’을 펴는 게 가능하다. 현재 축구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보건 정책, 문화 정책, 스포츠 정책 등 다양한 측면에서 분산돼 추진되고 있다. 통합적인 ‘축구 정책’을 수립해 앞으로의 월드컵에 준비한다면 “미래를 갖게 되는 사람들은 오늘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다”는 맬컴 X의 말처럼 우리는 미래의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갖게 될 것이다. 철학에서 말하는 현재주의·영원주의에서 영감을 얻어보자. 마치 현재만 존재하는 것처럼 오늘 축구를 즐기고 오늘 축구에 집중하자. 월드컵에서 우승한 미래를 그려보고 오늘 우리가 할 일을 역산(逆算)해서 따져보자.

김환영 중앙SUNDAY 지식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