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명소 즐비한 분단의 땅: 6월에 다시 가본 철 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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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7면

최전방의 군 부대에서 훈련 중일까. 간간이 포성(砲聲)이 들린다.

발을 딛고 선 곳은 민간인 출입 통제선에서 10여㎞ 거리에 있는 승일교(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철원 제일의 명승지라는 고석정(孤石亭)에 가려면 43번 국도를 타고 경기도 포천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신철원을 지나 463번 지방도로로 바꿔타야 한다. 지방도로로 갈아타고 가다 한탄강에서 승일교를 만나게 된다.

한때 철원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다리 이름이 이승만(承晩)전 대통령과 김일성(金日成)의 이름에서 각각 가운데 글자를 딴 것이라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더러는 '김일성을 이겨야 한다'는 뜻에서 이길 승(勝)자를 쓴 승일교(勝日橋)라 풀이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리 서쪽 입구에 새겨진 안내문에 따르면 사실은 이렇다. 한국전쟁 중 한탄강을 건너 평남 덕천에서 전공을 세우고 숨진 고 박승일(朴昇日)대령의 이름을 딴 것이다.

99년 7월 승일교 옆에 철제 다리인 한탄대교가 놓였다. 사람들은 승일교 대신 한탄대교를 건너게 됐다. 분단의 아픔이 새겨진 승일교는 긴 휴식에 들어갔다.

한탄대교를 건너면 왼편에 고석정 유원지가 있다. 유원지 안으로 들어가 물가쪽으로 가면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싼 협곡이 발밑에 나타난다. 협곡 안으로 파란 강물이 굽이굽이 흐른다. 폭 20여m의 강 한쪽에 20여m 높이의 거대한 바위가 하나 우뚝 서 있다. 이것이 고석정 이름의 유래가 된 바위다. 옛날에 있었다는 정자는 찾을 수 없다.

유홍준씨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고석정의 풍경에 대해 '우리나라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호쾌한 정경''부감법으로 조망하는 시원스런 눈맛을 갖게 한다'고 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신라 진평왕이 이곳에서 유람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서라벌(경주)에서 이곳까지 도대체 며칠 길이었을까. 단지 이 곳만을 오기 위해 떠난 행차는 아니었겠지만 며칠 고생을 감수해서라도 또 오고 싶은 길이었을 게다.

한탄강은 여느 강과 다르다. 원산과 서울 사이의 '추가령 구조곡'이라는 좁고 긴 골짜기를 따라 1백63㎞를 흐른다. 골짜기는 화산활동에 의한 지각 변동의 흔적이라고 한다. 때문에 한탄강에서는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는 현무암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뱀처럼 구불어진 협곡 한쪽에 여행객을 태운 조그만 유람선이 미끄러져 들어온다.

철원이 고향이라는 뱃사공 황태수(41)씨는 "한탄강은 골짜기 속에서 흐르기 때문에 장마 때라도 좀처럼 범람하는 일이 없다"면서 "게다가 가뭄 때도 물이 마르지 않아 이곳 사람들은 물 걱정을 안하고 산다"고 했다.

지방도로를 따라 2㎞ 정도 더 들어가면 만나는 직탕폭포(동송읍 장흥3리)에서 한탄강은 한번 더 신비함을 드러낸다.

우리나라 산과 계곡치고 폭포 없는 곳이 거의 없지만 이곳의 폭포는 매우 다르다. 높이야 3m 남짓하지만 그 폭이 80m에 이른다.

폭포 바로 위편 상류쪽에는 현무암 더미가 검은 색의 넓은 광장을 펼쳤다. 그 광장 끝에서 하얀 물줄기가 쉼없이 떨어져내린다. 흑(黑)·백(白)의 장쾌한 하모니다.

곧 이어 화개산(華開山)자락에 자리잡은 도피안사(到彼岸寺·동송읍 관우리)에 닿는다.

8백65년 통일신라 경문왕 때 도선국사(道善國師)가 창건했다는 절이다. 도선국사가 산수 좋던 곳을 찾던 중 '영원한 안식처 같은 곳에 이르렀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피안(彼岸)은 '이승의 번뇌를 해탈해 도달하는 열반의 경지'를 일컫는 말.

463번 지방도로 주변으로 모내기를 끝낸 논들이 시원하게 누워 있다. 양 옆의 철조망에는 '지뢰'라고 쓴 푯말이 어지럽게 붙어 있다.

길 저끝에는 전쟁 전 세워졌던 철원군 노동당사, 그리고 한국전쟁 중 열흘 동안 주인이 24번 바뀌었던 격전지인 백마고지가 기다리고 있다.

궁예가 태봉국을 세우고 도읍지로 삼았던 철원, 수많은 젊음이 스려져간 격전지, 겨울이면 저 북쪽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두루미들이 쉬어가는 곳. 영원한 안식처, 피안. 철원이 다시 피안의 땅이 될 날을 기다리며 지뢰밭 사이를 달린다.

철원=성시윤 기자

<여행쪽지>

규제완화 차원에서 민통선이 몇년에 한번씩 북쪽으로 옮겨지면서 2000년부터 노동당 철원군 당사, 백마고지 전적지까지 민간인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게 가능해졌다.

다만 현지 주민들과 인근 부대에 큰 골칫거리가 생겼다. 여행자들이 지뢰밭 안에 마구 버리고 간 쓰레기를 치우는 문제다. 전국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여행지를 내집 안방처럼 아끼는 마음이 절실한 때다.

민통선 이북의 제2땅굴·철의 삼각 전망대·월정리역을 여행하려면 고석정 유원지 내의 '철의 전적지 관리사무소'(033-455-3129)에 미리 신청해야 한다. 매일 오전 9시30분·10시30분, 오후 1시·2시30분 하루 네차례 인솔자가 견학을 안내한다.

한탄강 상류에 위치한 직탕폭포. 높지는 않으나 폭이 무려 80m에 달한다.

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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