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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분열의 유전자, 증오의 DNA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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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소통은 입이 아니라 귀에서 시작된다. 귀를 열어야 마음이 열린다. 성스러울 성(聖)자는 귀(耳)를 먼저 쓰고 그 다음에 입(口)을 쓴다. 예부터 입보다 귀를 먼저 여는 임금을 성군(聖君)이라 했다. 오늘의 국민주권시대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혀에는 뼈가 없다. 혀가 부드러운 이유다. 그러나 혀가 늘 부드러운 말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뼈대 없는 집안에서 막 자란 아이처럼 거칠고 못된 말을 내뱉기도 한다. 강아지가 귀여운 것은 혀를 흔들지 않고 꼬리를 흔들기 때문이다. 꼬리 대신 혓바닥을 놀려 짖어대기만 하면 발길질을 당하기 십상이다. 국민의 소리를 거스르고 제 목소리만 내다가 발길질을 당한 정권이 하나 둘이 아니다.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 들으면 소통이 될 수 없다. 권력의 두 귀는 좌와 우 양쪽에 고루 열려 있어야 한다. “가진 자들의 부패, 기득권층의 비리가 서민들을 슬프게 한다. 실업자가 넘쳐나는데, 정부는 경제지표의 수치만 읊어댄다. 나라의 요직을 특정지역, 특정인맥이 장악하고 있다. 국가안보 라인에 병역미필자가 태반이다. 전방 철책선에서 고위공직자의 자제들을 볼 수 없다. 천안함·세종시·4대 강 등 국가 주요 현안을 다루는 정부의 역량이 미덥지 못하다. 여당은 선거에 지고도 파벌싸움으로 정신이 없다….” 이 분노와 조롱과 탄식의 소리가 들리는가? 들리지 않는다면, 국민과의 소통은 단절된 것이다. 플루타르크가 경고한 ‘민중의 손’이 기다릴 뿐이다.

그러나 소통결핍은 비단 집권층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동안 야권은 포퓰리즘이라는 편리한 정치 메커니즘에 기대어 누구 말마따나 재미를 좀 보았다. 그러나 포퓰리즘이라는 것이 국민의 진정한 갈망을 책임 있게 담아내기보다는, 당장의 이해(利害)를 내세워 본질을 덮는 미봉책이거나 일시적 감성(感性)을 자극하여 표만 낚아채려는 정치적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고 보면, 야권 역시 국민과의 올바른 소통을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권자인 국민을 단지 ‘미봉책이나 바라고, 속임수에 넘어가기나 하는’ 우중(愚衆)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00E9> Ortega y Gasset)는 표피적인 선동에 휘둘리는 대중시대의 포퓰리즘을 ‘문화와 이성에 대한 반역’이라고 질타했다. 대중에게 권력의 완장을 채워주고 냉철한 이성, 합리적 지성을 핍박하도록 충동질하는 사회는 반문화적 광기(狂氣)에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역사의 증언이다. 나치에 열광한 독일의 극우 민족주의, 홍위병에게 박수를 쳐댄 중국의 극좌 문화혁명은 플루타르크의 ‘민중과 함께 망하는’ 두 길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이 극우·극좌의 두 길을 동시에 달려가는 것이 ‘우리 민족끼리’의 폐쇄적 주체사상이요, 선군(先軍)독재의 사회주의 혁명노선이다. 그 종착지가 어디일지를 굳이 물어야 하는가?

지금 우리 사회는 지역·이념·세대·계층·정파에 따라 서로 물고 뜯는 싸움이 가히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표현의 자유’가 ‘거짓의 자유’일 리 없건만, 핵무기를 만들고 어뢰를 쏘아대는 북한을 평화통일의 주체로, 숱하게 퍼주고도 늘 얻어맞기만 하는 대한민국을 반통일 전쟁광으로 둔갑시킨다. 그렇게 광우병 촛불을 부추겼고, 그렇게 천안함 사태를 뒤엎으려 든다. 비전문가들이 다국적 전문가들의 조사 결과를 헐뜯는 편지까지 유엔에 써 보낼 정도다. 조선의 사색당쟁도 이토록 그악스럽지는 않았겠다. 몸속에 ‘분열의 유전자, 증오의 DNA, 거짓말 염색체’라도 지니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독을 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도덕경에 “올곧은 이는 말이 없고, 말 많은 자는 바르지 않다(善者不辯 辯者不善)”고 했다. 남의 흠은 혹독하게 몰아치면서도 제 잘못은 돌아보는 법이 결코 없는, 항상 옳고 늘 당당하기만 한 여야 정치인들과 시민운동가들이 두 귀를 틀어막은 채 자기 말만 쏟아내고 있는 터에, 무슨 수로 소통을 기대하겠는가?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전 서울중앙지방법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