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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몽골리카'를 다시 보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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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몽골이 우리에게 준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수학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전해주지 않았다. 무려 3백년 가까이 러시아를 지배했던 몽골인들은 아무런 고급문화도 소유하지 않았다. 그들 야만족들에게 울어줄 눈물도 남아있지 않다." 러시아 시인 푸슈킨의 이 언명에는 분노마저 묻어있다. 몽골이 남긴 유산이 살육과 파괴에 불과하다는 판단, 거기에 대한 도덕적 단죄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정확한 역사적 사실일까를 되묻는 질문이 『유라시아 천년을 가다』이다.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2000년 7월 유라시아 대륙의 주요 루트를 답사, 인류 최대의 강역을 건설한 13세기 몽골 제국을 추적했던 공저자들은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박한제·김호동)·서양사학과 교수(한정숙·최갑수) 등이다.

공저자들은 "서울대에서 반경 50m 내에 연구실을 둔 사이"라고 자신들을 설명한다. 그러나 책을 보면 그 이상이라는 점이 감지된다. 각자의 사학 연구를 하면서도 현재의 근대사와 근대문명을 보는 문제의식이 닮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또 있다. 분과학문과 전공의 벽에 갇히지 말고 시선을 공유해 '근대문명을 넘어선 새 문명사의 패러다임을 모색해보자'며 의기투합을 하고 있음이 책에서 보인다. 이 점이 핵심이다.

따라서 '우정의 학제(學際)연구 저술'인 이 책은 8백년 전 '팍스 몽골리카(몽골인의 평화)'를 기행문 형태로 더듬어 보고 있다. 이들의 시각은 푸슈킨의 오해와 정반대다.

"몽골이라는 세계제국의 출현은 정치·경제적 통합을 바탕으로 그 이전 단절된 지역역사를 뛰어넘게 했던 계기"(2백66쪽)로 분석한다. 즉 13세기 전반 몽골의 정복과정은 파괴 대신 위대한 성취를 이뤘다는 게 최근의 연구결과를 중심으로 설명되고 있다.

오늘날 베이징의 모태를 만든 게 몽골이었고, 러시아 지배 중 몽골은 볼가강 하류에 신도시를 세워 사통팔달의 교역중심을 세웠다. 교역망을 깔고 화폐단위를 통일하기도 했다. 이런 성취는 팍스 몽골리카로 불리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다양한 종족과 언어, 그리고 종교를 포용했던 다원주의 문화정책이 오늘 우리 시대에 주는 강렬한 암시의 측면이다.

즉 공저자들은 팍스 몽골리카를 통해 15세기 이후 서구의 헤게모니 장악과 유럽중심주의, 그리고 현재의 지구화로 이어지는 세계사의 새 판, 새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싶었던 셈이다. 이마뉴엘 월러스틴 식으로 말해 근대세계체제로 불리는 근대국가 그 너머를 가늠하는 작업 말이다. 그 때문에 『유라시아 천년을 가다』는 역사 기행물을 넘어 문명비판서의 분위기를 풍긴다.

구체적으로 겨냥하는 것은 헌팅턴 류(流)의 서구중심주의와 문명충돌론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와 비판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다루는 시대의 폭이나 스케일에 비해 다분히 계몽적이고 입문적이라는 한계를 갖고있어 본격적인 담론의 몸싸움은 벌어지지 않는다.

각주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이 책이 보통의 독자들에게도 술술 읽히는 것은 그 때문이지만, 다소 싱겁다는 판단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시론(試論)적 성격의 작업을 보완하는 것은 이 책 저술에 참여한 중견 연구자들에게 주어진 앞으로의 몫이다.

한편 지난해 한국일보 장기 연재물을 보완한 이 책의 문제의식은 올해 초 정수일의 책 『고대문명교류사』(사계절)와 『실크로드학』(창작과 비평사)과 무관치 않다. 함께 읽어볼 만하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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