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흑인·여자는 안 된다” 42년간 군림한 오거스타의 독재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73호 16면

한자리에 앉은 보비 존스와 클리퍼드 로버츠(모자 쓴 사람). 로버츠 바로 뒤에 1965년 마스터스에서 우승한 아널드 파머가 그린 재킷을 입고 서 있다. [게티이미지]

클리퍼드 로버츠는 보비 존스와 함께 마스터스 골프 대회를 탄생시킨 주역이다.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과 마스터스의 공동 설립자인 그들은 마스터스의 양(陽)과 음(陰)이었다. 아마추어 정신을 지켰고, 그랜드슬램을 이룬 후 홀연히 은퇴한 ‘골프의 성인’ 존스는 클럽과 대회에 강렬한 빛을 불어넣었다. 1934년부터 76년까지 42년간 체어맨으로 군림했던 로버츠는 굳은 표정으로 장막 뒤에서 일했다. 존스는 신사였고 악역은 로버츠가 맡았다. 그러나 진정한 마스터스의 정신은 로버츠라고들 한다. 마스터스를 창조한 것은 존스였지만 이를 영원하게 빛나게 한 사람이 로버츠였기 때문이다.

돌아온 메이저 골프대회의 계절 <2> 마스터스 창조자 클리퍼드 로버츠

로버츠는 1894년 오지인 아이오와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업이 계속 실패하는 통에 자주 이사를 다녔다. 캘리포니아에 살 때는 캐디로 일하면서 골프를 알게 됐다. 그가 어릴 때부터 어머니는 여러 병을 앓았고 아들이 19세 때 권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아버지는 기차에 치여 세상을 떠났는데 역시 자살로 추정된다. 로버츠는 중학교 때 학교를 그만두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1920년대 월스트리트에서 주식 중개인으로 성공했다.

조지아주 오거스타의 온천으로 여행을 갔을 때 골프의 최고 스타 존스를 만나게 됐다. 여덟 살 어린 존스에게 로버츠는 강렬한 영감을 받았다. 둘은 의기투합했다. 존스가 1930년 그랜드슬램 후 은퇴해 자신의 골프장을 만들 계획을 세웠을 때 그가 옆에 있었다. 그들은 오거스타에서 완벽한 땅을 발견했다. 존스는 “이 땅은 누가 골프 코스를 만들어주길 기다려 온 땅 같다”고 말했다. 개울이 굽이쳐 흐르는 꽃 묘목장이었다. 마스터스에 꽃이 만발하고 홀 이름이 모두 꽃나무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미국 전역에서 회원을 받기로 했다. 그래서 골프장의 이름을 ‘오거스타 내셔널’이라고 지었다. 설계는 알리스터 매킨지가 했다. 매킨지도 존스처럼 인텔리(의사) 출신이다. ‘골프의 성당’이라는 사이프러스 포인트를 설계한 천재형 설계가였다. 코스 설립은 쉽지 않았다. 마침 터진 대공황으로 인해 로버츠는 큰 손실을 당했다. 입회비는 350달러, 연회비는 60달러였는데 불황이라 회원 유치에 애를 먹었다. 클럽은 부도 위기를 몇 차례 겪었다. 그러나 잡초 같은 로버츠가 집념으로 끌고 갔다.

정식 개장은 1933년 1월이었고 34년 첫 대회를 열었다. 대회 이름은 마스터스 토너먼트가 아니었다. 로버츠가 대회 이름을 마스터스로 하자고 했는데 존스가 반대했다. 당연히 수퍼스타 존스의 의견이 채택됐다. 존스의 의견대로 오거스타 내셔널 인비테이셔널 토너먼트로 정해졌다. 그러나 로버츠는 끝까지 존스를 설득해 5년이 지나 결국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클럽과 대회에 대한 로버츠의 집념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주도권은 서서히 그에게로 넘어갔다.

1948년 존스는 척수공동증에 걸렸다. 로버츠는 존스가 대회장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마스터스의 얼굴인 존스의 아픈 모습을 관중이 보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존스와 그의 가족들은 로버츠가 마스터스의 영광을 독차지하려 한다고 여겼다. 둘의 관계가 점점 벌어졌다. 로버츠는 존스의 장례식(1971년)에 초대받지 못했다.

로버츠는 마스터스의 독재자가 됐다. 로버츠는 “내가 살아 있는 한 마스터스의 선수는 모두 백인이고 캐디는 모두 흑인일 것”이라는 말을 한 적도 했다. 아직도 여성 회원은 없다. 여성 회원을 받지 않는다고 여성단체들이 반발했는데 “우리는 당신들의 캐비닛에 올릴 전리품이 되지 않겠다”며 꿈쩍도 안 했다. 회원들은 내부의 일을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된다. 사적 모임이니 이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런데 대회를 열면서도 그들은 출전 선수 등 규정을 마음대로 정했다. 경기 날짜도 나흘로 바꿨다. 이전까지 대회는 사흘간 열리는 대신 마지막 날 36홀을 했다.

돈 내고 경기를 보는 갤러리도 안 되는 것 투성이다. 뛸 수도 없고 망원경을 써서도 안 되며 맨발이어서도 안 된다. “그게 싫으면 오지 마라”는 것이 그들의 일관된 정책이다. 방송사도 제약이 많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반 9홀은 카메라에 잡히지 못했다. 신비감이 있어야 하고 직접 대회장을 찾은 갤러리에게 혜택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이런 규정들을 만든 로버츠는 중계권료를 가치에 비해 헐값에 파는 대신 매년 대회 후 중계방송사인 CBS에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이런 식이다.

미스터 보로스가 15번 홀에서 경기 중이었는데 TV 화면에는 17번 홀을 마친 것으로 되어 있었소. 방송에서 페어웨이를 ‘낙타 등’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말보다는 ‘굴곡’이 더 고상한 단어인 것으로 보입니다…. 중계방송의 첫 광고와 마지막 광고는 보다 더 점잖고 공익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을 것 같소….”

정중한 표현이지만 협박이다. 로버츠는 회원에게도 ‘심한 내기는 삼가 달라’라고 완곡히 말하지만 만약 이런 일이 생기면 가차없이 회원을 제명한다. 방송사도 마찬가지다. 마스터스는 한 번도 중계방송사를 바꾸지 않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 교체하기 위해 매년 계약을 갱신한다. 중계를 하다 말을 잘 못해 잘린 아나운서는 여럿 된다.

독재자로 군림한 그의 힘은 클럽과 마스터스에 대한 열정에서 나왔다. 경기 지역에 로프를 치고 선수와 캐디만 들어갈 수 있게 한 것은 로버츠의 아이디어였다. 관람객용 책자, 출발 시간표, 코스 지도, 코스 내 리더보드 등 지금은 일반화된 것들도 그의 발명품이었다. 그린 재킷을 입는 전통도 로버츠가 만들었다. 언더파는 빨간색, 이븐파 이상은 초록 색으로 표시하는 것도 그이며 클럽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파3 코스를 만든 것도 로버츠다.

잭 니클라우스는 “로버츠는 나를 볼 때마다 ‘대회를 발전시키기 위해 무엇을 바꿔야 하느냐’고 물었다. 나의 의견에 대해 검토를 한 후 바꾸든지 아니면 왜 안 되는지 꼭 설명해 줬다. 그의 모든 행동은 오거스타 내셔널 클럽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클럽뿐 아니라 골프라는 게임에 큰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

존스가 병에 걸린 48년 로버츠는 새로운 명사를 데려왔다. 당시 컬럼비아대 총장으로 재직 중이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다. 그는 오거스타 회원이 되면서 클럽의 권위를 높였다. 53년부터 61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할 때도 아이크는 40차례나 오거스타를 찾았다. 로버츠는 평생 그의 조언자로 살았다. 오거스타에는 아이크의 흔적이 많다. 아이젠하워의 이름을 딴 오두막, 호수, 나무가 있다.

로버츠가 오거스타에 있을 때 묵는 그의 방은 아이크 오두막 바로 옆에 있다. 로버츠는 1977년 7월 4일 밤 이곳에서 마지막 만찬을 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파3 코스로 가서 자신의 머리에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84세의 고령이 된 그는 여러 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의 시체는 아이크의 연못에서 발견됐다. 오거스타 회원들은 클럽 내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로버츠를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곤 했다. 죽어선 그의 몸은 물속에 들어갔다. 유언대로 수많은 마스터스의 사연을 간직한 15번 홀 연못 속에 유골이 뿌려졌다. 후임 체어맨들은 클럽의 정책을 정할 때 “로버츠가 살아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생각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