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울리지 않는 캐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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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올 겨울 날씨는 유난히 따뜻하다. 추운 마음을 위로하려는 것일까, 살을 에는 삭풍도 불지 않는다. 그건 좋은데, 따뜻한 겨울이 크리스마스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인지, 이번 연말에는 캐럴을 듣지 못했다. 기억하건대, 캐럴이 울리지 않는 12월은 별로 없었다. 어느 찻집에선가 바닥에 깔리는 듯 볼륨을 한껏 낮춘 캐럴을 들은 것도 같지만, 근심을 물리쳐줄 만큼 괜스레 흥을 돋우는 캐럴은 없었다. 캐럴은 고사하고, 이즘이면 잊었던 친구와 후배들, 제자들의 소식을 날라주던 그 흔한 카드가 책상에 쌓일 법한데, 공적 관계로 약간의 접촉을 했던 기관과 기업의 인사용 카드 몇 장을 제외하고는 적적하기 그지없다.

*** '좌충우돌'만 있고 성과는 없어

무신론자라도 12월이 되면 세상 그득한 성령(聖靈)을 고대한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를 무작정 비집고 들어가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울림을 전하고 급기야는 움츠린 마음을 열어젖히게 하는 것이 캐럴이다. 같이 살고 있음을, 같이 살아가야 할 것임을 감격스럽게 확인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없었다. 마음은 무엇엔가 지질렸고, 세상은 혁파되어야 할 악습들로 가득 차 있는 듯이 보였던 한 해였다. 올해 내내 한국 사회에는 '하늘엔 원리, 땅엔 정의'가 진절머리나도록 휘몰아쳤고, 그것도 모자라 '하늘엔 이념, 땅엔 투쟁'이 시민 모두가 좇아야 할 깃발처럼 나부꼈다. 사람들을 호명해 동지를 규합했고, 의기투합한 집단들은 무리지어 진지를 구축했으며, 다급해진 사람들은 거리로 나서 진군가를 불렀다. 그래서인지 캐럴 없는 12월은 허전하고, 신새벽의 해돋이는 부담스럽다.

지난해 한 해를 집약한 4자 성어는 '우왕좌왕(右往左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올해는 아마 '좌충우돌(左衝右突)'쯤 되지 않을까. 그런데 좌충우돌하고도 성과는 별로 없었다. 좌충우돌하도록 만든 계기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내년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퇴근길 뉴스였던가, 어느 종단에서 발했던 성탄 메시지는 소란스러운 정치와 침울한 경제 소식에 파묻혀 마음에 닿기도 전에 흩어졌다. '존중과 낮춤으로 살아가자'고 했던가, '변혁을 외치기 앞서 자신을 성찰하자'고 했던가. 아무튼 '난타의 2004년' 속에서 잊혔던 그 애틋한 말의 알갱이들이 눈송이처럼 떨어졌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세상의 모든 종을 울려 그윽한 말의 강설(降雪)로 정치를 달래봐야 원한.증오.미움의 단어들과 야비하고 속된 비난의 표현들이 쑥쑥 얼굴을 내밀 것이다.

천주교와 기독교가 이 땅에 온 지 200년, 성령과 복음을 전하던 초기의 전령들은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토굴 속에서 목회를 했다. 권력자들의 탄압에 개종보다 순교를 택했다. 그들의 순교가 헛되지 않았던가, 100년 뒤 한반도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어두운 시대를 비출 희망의 등불을 켰다. 또 다른 탄압이 한창이던 1970년대 중반, 명동의 본전다방이었던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들뜬 시민들의 흥겨운 표정을 중계 방송하던 기억도 난다. 그야말로 삭풍이 몰아치던 정치적 엄동설한의 시대에도 시민들은 희망을 주머니 속에 감추고 다녔다. 그런데 국민소득 1만4000달러에 도달한 이 풍요의 시대에 한껏 움츠린 손을 찔러 넣은 주머니 속에 희망이 만져지는가.

*** 시민들 마음속 희망은 꺼져가

이 시대를 끌고 가는 그대들은 80년대의 박해를 온몸으로 견디고 때로는 스스로 순교를 택한 사람들이다. 그 심정을 헤아리려는 듯, 세상에 복음을 전할 타종의 기회를 그대들에게 주었던 것 아닌가. 그런데 그대들의 품속에서 엄청난 봉화가 불타오르는 동안, 시민들의 마음에는 희망의 등불이 삭고 있는 것은 웬일인지. 그대들의 타종에 새로운 박해자들이 생겨나고 이름없는 순교자들이 모여들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고는 있는지. '우리에겐 영광, 당신들에겐 고난'을 한국 사회를 포박하는 단단한 사회심리로 고착시킬 그 무서운 가능성에 대해서 말이다. 산타는 꿈속의 인물임을 처음 알아챈 아이들이 크리스마스를 채색한 동경의 시선을 거두듯이, 시민들은 이제 그대들로부터 희망의 시선을 거둘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는 있는지. 어젯밤, 휴전선에서 마라도까지 산타는 오지 않았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