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산책] 여자복싱 챔프 김주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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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주희가 링 바닥에 엎드려 웃고 있다. 복싱하는 분위기를 부탁하자 글러브를 로프에 걸더니 관장실 앞에 있던 성탄 트리까지 링사이드에 갖다놓고 성탄절 분위기를 냈다. 김상선 기자

'베이비페이스 킬러-'. 지난 23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거인체육관을 찾았을 때 조그만 소녀가 기자를 맞았다. 19일 국제여자복싱협회(IF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타이틀전에서 멜리사 셰이퍼(미국)를 물리치고 최연소 세계챔피언이 된 김주희(18)였다. 환하게 웃는 모습은 영락없는 열여덟 소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아직 영광의 상처가 남아 있었다. 멍든 오른쪽 관자놀이와 찢어진 콧등.

# 나비효과

1999년 봄, 문래중 2년생 김주희는 언니(김미나.22) 심부름으로 체육관을 찾았다. 다이어트 복싱을 배우던 언니가 고교 3학년이 되면서 운동을 그만뒀고, 그는 언니 짐을 찾으러 갔던 것이다. 체육관에서 정문호 관장과 처음 만났다. "너 참 예쁘게 생겼구나." 정 관장의 칭찬을 받은 그는 얼굴이 빨개진 채 도망쳤다. 7개월 뒤 그는 다시 체육관을 찾았다.

"언니가 복싱을 배우래요."

빈혈 때문에 초등학교 3학년 때 시작한 육상을 중학교 1학년 때 그만뒀다. 우울해 하는 그에게 언니는 복싱을 권유했다. 그렇게 복싱 글러브를 끼게 됐다.

"영화 '나비효과'보셨어요? 시작이 조금만 달라져도 결과는 완전 딴판이잖아요. 언니 심부름이 세계 챔피언을 만들었어요."

# 살림꾼

성공 스토리는 대개 주인공의 신산한 삶을 품고 있다. 김주희도 그렇다. 그에겐 '네 살 터울의 어머니'가 있다. 언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 언니가 어머니 노릇을 했다. 언니는 빌딩 경비원인 아버지(김산옥.51)를 돕기 위해 고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집안일은 김주희 몫이었다. "제 손은 복싱만 하는 손이 아니에요. 요리도, 빨래도, 다 잘해요." 그는 뭐든 언니를 따라했고, 좋아하는 연예인까지 언니와 같은 가수 박강성이다. 복싱하는 사실을 3년간 아버지에게 숨겼다. 그런데 2002년 이인영과 한국 챔피언전을 앞두고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자 자매는 전전긍긍했다. 신문도 감추고, TV도 껐다. 이인영에게 KO패를 당한 날 아버지께 고백했다. 아버지 반응은 "졌다는 선수가 너구나. 어떻게 항상 이기겠니"뿐이었다. 세계 챔피언이 되고 받은 대전료로 아버지의 낡은 휴대전화를 바꿔드렸다. 아버지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에는 좀 적게 맞도록 해라."

# 때려

지난해 여고생 복싱선수의 성공기를 그린 드라마 '때려'가 SBS TV에서 방영됐다. 그 드라마의 소재가 된 선수가 바로 김주희다. 드라마 탄생과정도 드라마였다. 이인영과의 한국 챔피언전이 끝나고 며칠 뒤 한 방송작가가 체육관으로 전화를 해 김주희의 얘기를 쓰고 싶다고 했다. 정 관장은 "인영이한테 알아보라"며 거절했다. 며칠 뒤 체육관에 여자회원 한 명이 입관했는데, 의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운동하는 사람이 허리에 녹음기를 차고 정 관장과 김주희 얘기를 자꾸만 엿듣는 거였다. 두 사람이 다른 체육관이 보낸'스파이'냐고 다그치자 그제야 작가라는 고백이 나왔다. 작가는 2개월간 함께 운동을 했고, 드라마가 탄생했다. 촬영 때는 체육관이 연기자들로 북적거렸다. 한번은 녹화 도중 코미디언 조혜련이 그의 펀치에 맞고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물론 세계 챔피언이 된 뒤 '때려' 식구들의 축하메시지가 답지했다.

# 싸움

김주희가 반대로 질문을 던졌다.

"다른 기자들은 다 물어보던데…."

"뭘?"

"오락실 펀치기계 점수가 얼마나 나오느냐고요."

그렇지 않아도 물어볼 참이었다. 그런데 대답은 생뚱맞았다.

"전 프로선수라서 손을 다칠 일은 안 해요."

또 반대 질문이 이어졌다.

"남자 혼내준 적이 있나도 물어보던데."

얘기해보라 하자 "안 좋은 기억이 있다"고 했다. 복싱 입문 무렵 운동을 마치고 밤늦게 귀가하던 중 술 취한 남자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무서웠다. 울면서 비명을 질렀고 달려온 경찰 덕분에 봉변은 면했다.

"이젠 그런 사람 걸리면 국물도 없어요. 그렇지만 일반인은 안 때려요. 복싱은 싸움이 아니거든요."

셰이퍼를 꺾고 기도하던 모습이 떠올라 "성경에는 오른 뺨을 맞으면…"이라고 짓궂게 물었다. 우문현답이 이어졌다.

"링에서는 두 대 연속 맞으면 큰일나요. 한 대 맞으면 당연히 두 대 때려야죠."

# 꿈

그의 목표는 세계 여자복싱 4대 기구의 통합 챔피언이다. 이번에 IFBA 챔피언이 됐으니 여자국제복싱협회(WIBA).여자국제복싱연맹(WIBF).여자복싱네트워크(WBAN)가 남았다. 스무 살이 되는 내후년까지는 목표를 이룰 작정이다.

IFBA 챔피언 도전을 위해 지난 7개월간 매일 15㎞를 뛰었다. 무려 3000㎞. "1500㎞ 뛰었다고 해도 어차피 사람들이 믿지 않을 테니 아예 1000㎞ 뛰었다고 하랬어요. 관장님이." 그래서 언론에는 1000㎞를 뛰었다고 보도됐다.

다음 목표로 가는 길은 더 험하다. 그도 알고 있다. "12월 31일까지만 세계챔피언 할래요. 내년 1월 1일부터는 다시 도전자예요." 자신을 '작은 거인'이라 불러달라는 김주희. 그렇게 커보일 수 없었다.

장혜수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 ◆김주희는

▶출생 = 1986년 1월 13일 서울

▶학교 = 도림초-문래중-영등포여고

▶별명 = 땅콩(체육관 오빠들이 붙여준 별명, 본인은'작은 거인'을 원함)

▶신체조건 = 1m60㎝.48㎏(평소 체중은 51㎏)

▶데뷔전 = 2001년 6월 30일 한.일 논타이틀전(사와이 미와와 무승부)

▶전적 = 9전7승(2KO)1무1패

▶주요 타이틀 = 한국권투위원회(KBC) 여자 플라이급 챔피언(2003)/KBC 여자 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2004)/세계여자복싱협회(IFBA) 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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