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정부 성토場' 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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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고층빌딩이 숲을 이룬 싱가포르 도심에 홍림공원이란 이름의 작은 공원이 있다.이 공원에 2000년 9월 '스피커스 코너'란 이름의 표지판이 설치됐다.

싱가포르 정부가 '무슨 내용이든 대중을 상대로 말하고 싶은 사람은 경찰에 신청서를 낸 뒤 자유롭게 연설하라'는 취지로 무대를 마련한 것이다.

영국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 있는 같은 이름의 공간을 본뜬 일종의 '자유발언대'다.

개설될 당시 스피커스 코너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정부 비판이 엄격히 금지된 싱가포르에서 마음껏 정부·여당을 성토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야당과 시민단체 관계자는 물론 평범한 시민까지 연사로 나와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몇차례 연사로 나섰던 화교 2세 高모(70)씨는 "많을 때는 하루 20명씩의 연사가 나왔고, 퇴근길에 모여든 1백~2백명의 청중과 즉석토론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연설내용도 "고위 관리들의 월급이 너무 많다"거나 "세금과 의료비가 너무 높아 서민은 허리가 휠 지경이다" "영어 위주의 교육정책으로 중국어가 점점 잊혀지고 있다" 등 각양각색이었다. 스피커스 코너가 성황을 이루자 "싱가포르에도 언론자유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는 희망어린 관측까지 나왔다.

하지만 그같은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개설 서너달 만에 연사 수가 급격히 줄더니 최근엔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스피커스 코너를 관리하는 크레타아이어지구 경찰관계자는 "이번 주에 예정된 연설은 금요일 두 건, 일요일 한 건 뿐이며 그나마 단골 연사들"이라고 말했다. 공원 내 식당주인은 "언제부터인가 노숙자들이 더위를 식히거나 인근 회사원들이 산책하는 곳으로 바뀌고 말았다"고 말했다.

스피커스 코너가 외면받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시정을 촉구해봤자 아무런 반응이 없는 '메아리 없는 외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일당지배 체제인 싱가포르에선 '말의 자유'가 엄격히 제한되고 있다. 신문·방송들은 전직 각료 등 친정부 인사들에 의해 운영되고 정부의 통제를 받기 때문에 비판적 기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대학생이나 노동자들의 집회·시위는 중벌감이다. 高씨는 "평범한 시민이라도 함부로 정부를 비판했다가 누군가 밀고라도 하면 세무조사 등 귀찮은 일을 당하게 된다"고 말했다.

자영업자 필립 탄은 "싱가포르는 이민자들로 구성된 나라여서 국민들이 돈벌이 외의 나라 일이나 사회현상엔 별 관심이 없다"면서 "통제에 익숙해져 그리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싱가포르=예영준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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