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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워크아웃 ‘처방’ 기다리다 숨넘어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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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중견 건설사 A사는 최근 채권단에서 C등급 판정을 받아 워크아웃(채권단 공동관리) 대상에 들어갔다. 이게 알려지면서 이 회사의 분양 대금 수입은 급격히 줄었다. 이미 분양을 받은 사람들이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하는가 하면, 중도금을 제때 내지 않는 사람도 늘었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로 가면 조만간 협력업체에 공사 대금을 주기 어렵다는 것이 회사 측의 얘기다.

다른 건설사 B사는 5월부터 사실상 영업을 중단했다. 채권은행들이 신용위험 평가를 하는 과정에서 워크아웃 대상에 포함됐다는 말이 돌았기 때문이다. 은행에 대출을 신청해도 “평가가 끝난 다음에 보자”는 말만 돌아왔다. 실제 6월 말 신용위험 평가에서 C등급을 받자 상황은 더 어려워졌다. 공사 수주가 거의 된 상태인데 공사보증업체에선 신용등급이 떨어졌으니 보증료를 대폭 올리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자재업체들은 현금을 내지 않으면 자재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알려왔다.

금융당국과 채권단은 지난달 25일 건설사와 대기업 신용위험평가 결과를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채권은행을 대표한 이종휘 우리은행장은 “38개 워크아웃 대상 기업에 대해선 경영정상화 계획을 조기에 확정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C등급 업체들은 워크아웃이 ‘기업 살리기’인지 ‘기업 죽이기’인지 구별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워크아웃을 시작해 실사를 거쳐 경영정상화 계획을 확정하는 데 보통 2~3개월이 걸린다. 이때까지 C등급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얻는 피해가 크다는 것이다. C등급을 받은 한 건설사 간부는 “자금이 꽉 막혀 버렸다”며 “C등급이란 낙인이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고 말했다.

건설업계에선 워크아웃에 들어가면 자칫 회사가 고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지난해 C등급을 받아 워크아웃을 진행 중인 한 건설사는 지금까지 신규 사업을 단 한 건도 하지 못했다. 채권은행이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을 통한 대출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 측은 “인건비 등 고정비는 계속 나가는데 신규 사업이 없으니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며 “이대로 가다간 퇴출당할지도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워크아웃 대상 지정에서 워크아웃 개시에 이르는 기간 중 해당 기업은 금융지원도, 신규사업도 할 수 없는 처지다. 그 사이에 가뜩이나 빡빡한 재무구조는 더 나빠진다. 이 공백기를 기업이 알아서 견뎌야 하는 게 현재의 워크아웃 제도다. 구조적인 문제인 셈이다.

C등급 업체의 정상화를 위해 별도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게 건설업계의 주장이다. 건설산업연구원 김현아 연구위원은 “워크아웃 대상 발표 이후 2~3개월 동안 건설사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금융권이 긴급 자금을 수혈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은행권은 신중하다.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신규 자금을 지원하면 은행의 손실이 커질 수 있다는 논리다. 또 은행들끼리 신규 자금 지원을 합의하기도 쉽지 않다. 시중은행의 워크아웃 담당부장은 “부실 우려가 있으면 초기에 워크아웃을 해야 하는데 건설사들이 끝까지 버티다 너무 늦게 들어온다”며 “숨겨진 부실이 있을 수 있어 신규 자금 지원엔 신중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정책적인 대안을 내놓질 못하고 있다. 그저 은행권과 건설사 모두에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익명을 원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채권은행들이 일단 C등급으로 평가했다면 책임을 지고 해당 기업을 회생시켜야 할 것”이라며 “건설사들도 자금 지원 요구에 앞서 구조조정 등 뼈를 깎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고 말했다.

김원배·박일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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