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산업 도약 위해 정책 패러다임 바꿀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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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토머스 쿤은 20세기 최고의 1백대 책 중 한권으로 선정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 역사는 단선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비약한다"고 주장, 선풍을 일으켰다. 여기서 그는 유명한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사용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21세기를 미디어 혁명 시대라고 말하기에 주저함이 없다. 이는 미디어가 사회·문화적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점을 주목한 것이다. 실제로 미디어는 정치적으로는 쌍방향 참여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있는 데다 일과 여가의 활용 등 일상에서도 미디어의 기능이 더 강하게 요구되고 있다.

이미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들은 커뮤니케이션 및 미디어 혁명의 조류를 읽고 미디어의 정책·법제적 패러다임 전환을 이뤘다. 미디어 산업의 '탈규제'와 '민영화'가 그 중심 기조였다. 자국의 미디어 그룹이 국제적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다각 경영의 폭을 넓혀준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아직도 정치적 논리에 밀려 미디어의 산업적 성장 가능성이 억압받고 있다. 최근 한나라당의 국가혁신위원회가 제안한 미디어 정책을 뜯어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새로운 제안을 내놓기보다 아직도 권위주의 유산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의미다.

현 시점에서 긴요한 것은 우리 미디어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한 어젠다들이다.이는 국제화 흐름에 부응하는 전략으로도 불가피하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먼저 정기간행물법·방송법 등을 전면적으로 개정, 지역을 달리하면서 동종 매체를 복수로 소유하거나 공중파 방송에 참여하는 등의 겸영을 허용해야 한다.

이같은 다각 경영은 독일의 베텔스만, 스위스의 노이에 취리히 차이퉁, 스웨덴의 보니에 같은 국제적 미디어 그룹과 경쟁하는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공중파에 민간의 입김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점이다.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한 민주국가 중에서 사용 가능한 공중파 방송 채널 여섯개 중 다섯개를 정부가 가지고 있는 국가는 한국뿐이다. 독일의 경우 정부는 두 채널만 공영방송으로 운영하고, 나머지는 민영화해 공·민영 자율 복수경쟁 체제로 전환한 바 있다.

셋째, 라디오 시장의 혁신이다. 오늘날 라디오는 가장 진보적인 매체로 인정받고 있다.왜냐하면 시장 진입의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게 들고, 타 매체에 비해 가장 다양한 의견 반영과 프로그램 진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방자치의 정신에 맞게 많은 지방 라디오 채널들을 허용해야 한다.

넷째,미디어 시대에 걸맞은 미디어 교육의 제도화다.미국·독일 등 선진국들은 중·고등학교 교과 과정에 저널리즘·영상제작 등을 정규 과목으로 편입시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제 우리는 중앙아시아와 동남아 쪽 미디어 분야의 자유 신장과 시스템 구축을 지원할 프로그램을 구상해야 할 시점에 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는 서유럽 국가들이 실패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미디어 재건을 지원했던 것과 흡사하다.

미디어 산업의 경제적 의미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한 독일 학자는 선진국의 경우 2015년 정도에 취업 인구의 30%가 미디어 관련 산업에 종사하게 될 것으로 추산하면서 정치 권력이 미디어 장악을 도모하는 것 등은 아예 불가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따라서 우리 정치권도 소모적이고 패권적인 정쟁보다 패러다임을 바꾸는 작업을 먼저 하길 바라고 싶다.

미디어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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