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기의 품위가 한단계 올라갑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9면

흙과 불의 예술인 도자기와 패션 디자이너가 만났다. 행남자기가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선보인 '패션 디자이너스 테이블웨어(식기)'에서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디자이너는 강진영·이광희·이영희·정구호·지춘희·진태옥씨 등 여섯명. 모두 한국 패션계를 이끌고 있는 쟁쟁한 인물들이다. 이 행사는 기술력·품질은 세계 수준이지만 상표 인지도가 해외 유명 업체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우리나라 도자기의 수준을 디자인의 변화를 통해 한단계 격상시키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뜻깊다.

영국의 '웨지우드'등 세계적 도자기 업체들은 이미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의 디자인을 도자기에 접목시키고 있다. '겐조''에르메스''베르사체'등 토털 패션 디자이너 브랜드들도 고유의 디자인을 반영한 도자기를 선보이고 있다.

행남자기 디자인연구소 김태성 소장은 "올 해를 시작으로 해마다 건축가·사진작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도자기 디자인에 참여시킬 계획"이라는 발상의 변화를 보였다.

패션과 마찬가지로 도자기 역시 생활양식의 변화와 맞물려 디자인이 변해왔다. 행남자기 김용주(61)회장은 "1960년대에는 큼직한 홍장미 문양이 그려진 그릇이 집집마다 있었고, 70년대에는 프린트를 뜬 전사(轉寫)무늬 그릇, 경제가 호황이었던 80년대에는 인공적인 금 광택이 나거나 금 장식이 있는 그릇이 유행이었다"고 회고했다.

한국도자기 디자인실 유상영 과장은 "'동·서양의 만남'이 화두로 떠오른 90년대 이후에는 서양 도자기 회사들도 동양적 분위기의 제품을 많이 내놓고 있다"며 "국내용·국외용 디자인이 따로 없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라고 말했다.

한국도자기와 행남자기 등 국내 도자기 회사들은 약 5년 전까지만해도 유럽·미국 등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으로 수출하는 제품이 많았으나 최근에는 자사 상표 제품의 수출 비율이 점점 커지고 있다. 지난해 매출액이 7백90여억원으로 세계 5위권인 한국도자기는 미국·싱가포르에 운영하고 있는 직영 매장을 말레이시아·캐나다·중동 등에도 설치할 계획이다.

전체 도자기 생산량의 약 30%를 수출하고 있는 행남자기의 경우 올해 수출 목표액을 지난해에 비해 30% 증가한 1백60억원으로 잡고 있다.

이번에 행남자기에서 선보이는 도자기와 패션 디자인이 어우러진 6개의 그릇 세트 위에선 패션디자이너들의 개성이 그대로 펼쳐진다.

브랜드 '오브제'의 디자이너 강진영씨는 미국 뉴욕 소호에 있는 자신의 매장 번지수 '125'가 크게 쓰여진 장난스러운 그릇을 선보였다. 새·별·달을 모티브로 한 이광희씨의 그릇에선 특유의 우아하고 로맨틱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가장 한국적인 패션디자이너'중 한 사람인 이영희씨는 그릇 위에 봉황 문양을 자수(刺繡)의 질감이 느껴지도록 표현했다. 정구호씨는 흰 그릇에 초록색 달리아를 그려넣었다. 흰 바탕에 검은 점이 박힌 지춘희씨의 찻잔 세트는 그의 옷만큼이나 모던하고 세련된 느낌이다. 진태옥씨는 여러 가지로 활용할 수 있는 흰색 그릇에 손으로 그린 듯한 느낌의 줄무늬를 한가지 색상으로 입혔다.

3백점 한정 수량으로 제작된 패션 디자이너들의 그릇들은 오는 7월 14일까지 서울 신사동 행남자기 직영점(02-540-7900)에서 볼 수 있다.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7층에서도 30일까지 전시회가 열린다.

글=김현경, 사진=안성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