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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되찾는 일에 남은 삶 바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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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해경 여사(80·사진)를 보는 순간 과거 사진 속에서 봤던 고종의 얼굴이 떠올랐다면 지나친 선입견이었을까. 이 여사는 고종 황제의 손녀다. 정확히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다섯째 딸이다.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이 여사가 29일(현지시간) 꼭 100년 전인 1910년 이날 일제가 강탈했던 대한제국 주미 공사관 건물 되찾기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워싱턴을 찾았다.

이 여사는 한국역사보존협회(이사장 윤기원)와 미 연방하원의원 출신의 로널드 콜맨 변호사가 미국 사회에 이 문제를 널리 알리는 데 공동 노력하기로 약속하는 협약식에 참석했다. 14년 동안 의원을 지냈던 콜맨 변호사는 최근 한국인 부인으로부터 공사관 건물 이야기를 듣고 되찾기 운동에 동참했다. 벌써 민주당 소속 7명의 하원의원으로부터 취지에 공감한다는 서명을 받아냈다.

이 여사는 “6년 전 뉴욕으로 찾아온 윤 이사장으로부터 공사관 이야기를 듣고 이것만은 꼭 되찾아서 역사의 현장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아무런 힘이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뒷받침은 다하고 싶어 이 자리에 왔다”고 말했다. 또 “일본에게 강탈당한 것이 많지만 워싱턴 한복판에 있는 공사관 건물의 의미는 적지 않다”며 “이제 삶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공사관을 되찾는 것이 역사를 되찾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 여사는 당시 단 돈 5달러에 일본에 팔렸던 공사관 계약서의 위조 여부를 밝히기 위해 고종 황제와 민병석 궁내대신의 평소 서명을 구해 보존협회에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로선 공사관 건물 되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소유권이 미국인으로 다시 넘어가 일본을 상대로 한 소송이 어려워졌다. 게다가 한국의 관심이 알려지면서 건물주가 계속 값을 올리고 있다. 이 여사는 “미국 주류 사회에 건물 강탈과정이 소상히 알려져서 일본이나 건물주에 압박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협약식에서 나이든 참석자가 이 여사를 공주라고 불렀다. 콜맨 변호사도 “(이 여사) 옆에 앉는 게 영광”이라고 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을 궁에서 보낸 이 여사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공주의 위엄보다 오랜 미국 생활에서 익숙해진 겸손한 태도였다. 말을 짧게 했고 좀처럼 앞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이 여사는 인사동 사궁과 안국동 별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의친왕이 사망한 바로 다음해인 1956년 26살의 나이에 혼자 미국으로 건너왔다. 한국에서 경기여고와 이화여대를 마쳤던 이 여사는 미 텍사스주의 메리 하딘 베일러 여대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그러나 직장은 전공과 달랐다. 뉴욕의 컬럼비아대 동양학 도서관에서 한국학 사서로 27년간 일했다. 지금도 여전히 혼자 산다. 다음은 일문일답.

-하루를 어떻게 보내시나요.

“여전히 컬럼비아 대학 근처 아파트에서 지냅니다. 별로 하는 일 없어요.”

-바깥에는 잘 안 나가시나요.

“일주일에 한 번 뉴저지 한인 복지센터에 나가서 한국분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드려요. 가곡이나 외국노래를 하고, 가끔은 가요도 좀 배워서 가르치고 그럽니다.”

-한국에는 가시나요.

“종종 갑니다. 지난해 11월 경기여고 박물관에 어머니가 입으시던 옷을 기증하고 강의도 했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실 것 같습니다.

“마지막 황실이 어떻게 살았는지 제가 마지막으로 본 거 같아서, 조금이라도 뭔가 남겨야 하지 않나 싶은데 옛날 살던 이야기 한번 쓰고 싶지만 아직은 그냥 생각만 있어요.”

-좋아 보이시는데 건강 비결 있나요.

“없어요. 앞으론 여행을 좀 많이 하려고 해요. 미국도 좋고, 외국도 좋고. 한국인 친구들이 많이 있어서 외롭지는 않아요.”

워싱턴=글·사진 김정욱 특파원

◆대한제국 주미 공사관=미 백악관 북쪽 로간 서클에 아직도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미수교 뒤인 1891년 우리가 2만5000달러를 들여 매입했다.

그러나 공사관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폐쇄됐고, 1910년 한일합방 뒤 일본은 단 5달러에 건물을 강탈한 다음 곧바로 10달러에 미국인에게 팔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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