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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건물서 꽃피운 국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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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 98의 5. 내가 1959년부터 6년간 중·고교 학창시절을 보낸 추억의 장소다. 55~68년 국립국악원과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 양성소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하지만 옛 건물은 완전히 사라지고 지금은 삼환기업 본사 빌딩이 창덕궁을 내려다 보고 있다. 금위영터(禁衛營址)라는 작은 표석만 외롭게 서있을 뿐이다.

'임진왜란 때 세워진 오군영(五軍營)의 하나인 금위영 자리'.

국립국악원은 51년 한국전쟁 당시 부산 동광동에서 문을 열어 서울 소공동·계동·당주동 등을 전전하다 55년 9월 종로구 운니동 금위영 자리로 왔다.

국립국악원 옆에는 운현궁 방향으로 큰 버스 공장이 있어 소음공해가 심했다. 드럼통을 망치로 두들겨 버스 몸체를 만들던 시절이었다. 피리와 가야금 가락에 흠뻑 빠지기라도 하면 금세 망치 소리가 들렸고 교사와 인접해 있던 주택가에서는 장구 소리가 시끄럽다고 항의를 퍼붓기도 했다.

방과 후엔 개인 연습을 하느라 시간이 없었지만 짬을 내 평화극장·우미관 같은 재개봉관에서 서부영화를 즐겨 봤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학생도 많았지만,전교생이 매월 장학금 3백원씩을 받는 날이면 지금의 일본문화원 주차장에 있던 중국집 복승루에 모여 자장면을 실컷 먹었다.

낡은 건물이라 마루 바닥이 내려 앉아 발이 쑥 빠지기도 하고 수업시간에 쥐가 튀어 나와 배꼽을 잡기도 했다. 하지만 건물의 고풍스런 분위기는 국악의 고즈넉한 멋과 잘 어울렸다. 창덕궁 앞 종로 3가에는 당시 성금련 명창 등 인간문화재들의 개인 전수소들이 유난히 많이 몰려 있었다. 몇해 전부터인가 이곳을 '국악로'라 부르고 있는데 적절한 명칭이라고 생각한다.

60년대초 을지로 입구에 있던 원각사에 큰 불이 났다. 다행히 화재에서 살아남은 솟을 대문과 극장 내부의 무대시설을 국립국악원으로 옮겨왔다. 정문은 새로 단청을 입혔고 공연장(1백44석)은 현대식으로 그럴듯하게 꾸며졌다. 국악원 내 공연장'일소당(佾韶堂)'은 푹신한 의자에다 난방시설과 로비까지 갖춰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의 필수 코스였다.

아쉬운 것은 국립국악원이 국립극장 개관과 함께 남산 장충동으로 옮겨가면서 옛 건물의 자취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 자리에 국립국악원 강북 분원이라도 설치했더라면 창덕궁을 방문하는 외국 관광객을 위한 상설 국악공연이 더욱 활기를 띨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윤미용 <국립국악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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