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완 시대 열렸다 ① 14억 중화시장 탄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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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체결되는 중국·대만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은 ‘경제 국공(國共) 합작’이라고 부를 만큼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우선 ECFA 발효 후 양측이 대만의 539개 상품, 중국의 267개 상품에 대해 상호 관세를 대폭 낮추기로 돼 있다. 이뿐 아니라 병원·은행 등 서비스 산업의 대폭적인 개방에다 투자자들을 위한 보호장치가 구비됨으로써 보다 자유로운 경제교류가 가능해진다. 이 협정이 발효돼 본궤도에 오르면 인구 14억 명, 국내총생산(GDP) 규모 5조3000억 달러(약 6360조원)에 이르는 거대한 시장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ECFA 발효 후에는 양안 간 경제적 상호의존도가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이 커져 정치적 안정을 굳건히 다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특히 이번 협정에서는 대만산 제품에 대한 관세 혜택이 중국산보다 훨씬 더 많아 중국 당국이 대만을 정치적·경제적으로 포용하려는 조치로 해석되고 있다.

대만 야당인 민진당 지지자들이 26일 ‘중국과의 경제협력기본협정(ECFA) 반대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타이베이 AFP=연합뉴스]

◆대만 배려한 관세 철폐=이번 ECFA는 원칙적으로 양측 간 서로의 국내 산업에 타격을 덜 주는 품목을 중심으로 관세를 철폐하도록 돼 있다. 아울러 관세철폐 대상 품목들도 과거 세율이 얼마였느냐에 따라 다르게 대접받는다. 그동안 15% 이상의 관세를 내야 했던 품목들은 3년에 걸쳐 철폐되는데 첫해는 10%, 다음해는 5%, 그 다음해는 완전히 없어진다. 반면 5~10%의 관세율 품목은 첫해 5%, 다음해에 철폐, 그리고 5% 미만은 ECFA 발효 직후 사라지게 된다.

관세품목 숫자로 볼 때 중국보다는 대만산 제품이 두 배 이상이다. 이로 인해 이번 ECFA 발효 후 대만 쪽 혜택이 더 많을 거라는 게 일반적 평가다. 심지어 중국의 일부가 된 홍콩보다도 더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는 이야기마저 나온다. 특히 대만은 기계·석유화학·방직·전자·자동차부품 분야에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간 중국은 이들 품목에 대해 6.25~25%의 관세를 적용해 왔다. 실제로 대만의 공은증권 보고서에 따르면 석유화학 부문은 대중 수출 비중이 전체 수출의 50%를 넘고 있어 관세 인하·감면의 가장 큰 수혜 품목으로 꼽히고 있다. 아울러 총 매출의 60% 이상을 수출에 의존하는 대만의 기계 산업은 그간 한국·일본과 비슷한 조건에서 중국 시장을 공략해 왔지만 앞으로는 훨씬 유리한 가격 조건 덕에 시장 점유율을 높일 걸로 기대되고 있다.

◆서비스 분야도 개방=관세 철폐와 더불어 중요하게 다뤄진 분야가 서비스 부문이다. 중국은 대만 병원과 은행 등에 가해던 많은 규제를 풀어줄 방침이다. 은행·병원·증권·보험에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11개 분야가 혜택을 보도록 돼 있다. 예컨대 금융업의 경우 대만계 은행의 지점 설립 요건이 완화되고 위안화 거래도 보다 쉬워졌다. 중국에 설립된 대만계 은행지점은 설립 후 2년 이후엔 위안화로 금융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만계 은행의 중국 지점들이 중국 내 대만 기업들에 돈을 빌려줄 수도 있다.

◆양안 간 정치적 타산 작동=이번 ECFA의 타결은 중국과 대만 양측 당국의 정치적 이해가 맞아 떨어져 도출된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대만에 경제적 혜택을 베풀어 줌으로써 양측 간 관계를 발전시키고 이를 통해 대만을 껴안으려는 조치로 풀이되고 있다. 씨티은행은 ECFA가 발효되면 대만 경제성장률이 1%포인트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반면 집권 당시부터 중국과의 긴밀한 경제관계 구축을 외쳐온 마잉주(馬英九) 대만 총통으로서는 자신의 약속을 진일보시킨 셈이 됐다. 다만 양측은 이번 협정 발효로 자국 산업이 타격을 입을 게 분명한 분야는 관세 철폐 대상에서 뺐다. 중국 농산물이 제외된 게 대표적인 사례다. 또 중국인 노동자의 대만 취업도 허용되지 않았다.

충칭=장세정 특파원

◆국공합작=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맺은 두 차례 협력 관계. 1924년부터 3년여 동안의 제1차 국공합작은 민족혁명이 목적이었다. 제2차 국공합작(37~45년)에서는 일본에 맞서기 위해 통일전선을 결성했다. 일본 패망 후 양측은 45년 8월 충칭에서 내전을 피하기 위한 정치협상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양측은 결국 내전 끝에 제각기 정부를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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