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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시나리오 작가 개념이 바뀐다: 건물짓듯 쓰는 '맞춤 시나리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최근 시나리오 작가로 각광받은 사람으론 박정우씨가 있다. '주유소 습격사건''선물''신라의 달밤'이 잇따라 히트하면서 국내 작가로는 거의 처음으로 원고료 외에 흥행 수익의 일정 부분을 보장받을 만큼 지위가 단단해졌다. 그런데 그는 감독 데뷔를 준비하고 있다. 그 전단계로 시나리오 쓰기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고씨와 박씨는 한국 영화계에서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그들만큼 대우를 받는 작가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박씨는 감독을 지망한다. 아직 작가들이 제작 현장에서 제 기량을 발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시나리오는 감독·제작사의 손에서 재단되는 게 통례다.

요즘 충무로에선 시나리오 전쟁이 한창이다. 돈도 넘치고 시나리오도 많지만 쓸 만한 물건이 적다고 아우성이다. 당연히 작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영화사마다 기량 있는 작가를 구하려 애쓰고 있다.

최근 한국 영화가 전대미문의 활황을 보이면서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이 늘고 있다. 영화진흥위나 영화·방송사 등이 주최하는 공모전도 활기를 띠고 있다. 일례로 영진위의 극영화 시나리오 공모에 참여하는 숫자가 지난 4년새 1.7배로 증가했다. 대학 부설 교육원이나 각종 문화센터가 마련한 시나리오 강좌도 북적댄다.

그런데 질적 성장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시나리오 완성도가 예전만 못한 것 같다는 푸념도 들린다. 이는 1990년대 이후 영화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 탓으로 해석된다. 문학성을 갖춘 탄탄한 드라마보다 세태를 순간순간 반영하는 기획성 작품이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프로덕션 시스템이 확산되면서 프로듀서의 영향력이 훨씬 커진 현실도 작용했다. 지난해 쏟아졌던 고만고만한 수준의 '조폭영화', 올해 그 기세를 이은 '건달영화'는 이런 흐름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백두대간 이광모 대표는 "최근엔 숙성 과정을 거치지 않은 속전속결형 작품이 양산된다"며 "드라마 완성에 필요한 시간과 인력의 투자엔 오히려 인색해진 편"이라고 말했다. 작품의 절반 이상을 결정하는 시나리오보다 스타급 배우·감독을 물색하는 데 열심이라는 설명이다.

요즘 영화판에선 시나리오 전업작가를 찾기 어렵다. 50년대의 오영진씨, 그 후의 윤삼육·임희재·김강윤·신봉승·곽일로·유두연·송길한·지상학씨 같은 쟁쟁했던 전업 작가층이 실종된 것.

전주영화제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송길한씨는 "태작도 많았지만 수십~1백여편을 썼던 전업작가들이 각기 생활고나 기획실 중심의 제작환경 때문에 하나 둘씩 사라지는 것은 영화계의 불행"이라고 말했다.

반론도 만만찮다. 영화평론가 조희문(상명대)교수는 "문예영화 위주의 한국 영화가 최근 코미디·호러·스릴러 등 장르·소재의 다양화를 추구하면서 작가의 개념도 달라졌다"며 "급변하는 트렌드를 간파하고, 이를 영상에 옮기는 순발력이 부족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추세 속에서 쿠앤필름·다다필름·씨앤필름 등 많은 영화사는 자체적으로 작가팀을 꾸려가고 있다. 여러 명의 작가가 아이템 발굴·취재·집필을 공동으로 한다. 제작의 아이디어를 보강하고, 원안의 가공도를 높이는 주문형 창작집단도 생겨났다.

지난해 히트작 '두사부일체'를 수주하고 현재 '코끼리 무덤''왕조의 눈'등을 작업하고 있는 네오픽션의 하원준 대표는 "이제 영화는 예술이라기보다 산업"이라며 "시나리오 작가는 어떤 서비스 정신으로 관객을 공략할지를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나리오는 글쓰기 경연이 아니라 경제 컨설팅에 가깝다는 것이다. 특히 막대한 제작비가 들어가는 블록버스터일수록 작가들의 공동작업이 필수적이라고 덧붙였다.

그래도 과제는 많다. 무엇보다 시나리오 작가의 신분 불안이 현안이다.

현재 영상작가시나리오작가협회(회장 유동훈)에 가입한 작가는 1백20여명. 미가입 작가를 포함하면 대략 2백5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중 원고로 생계가 가능한 사람은 10여명에 불과하다. 일급 작가의 편당 고료가 5천만원에 이르나 1년에 두 편 이상을 쓰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하면 양호한 조건은 아니다. 제작비 대비 10%에 이르는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투자 비율도 한국에선 3%선에 그친다. 시나리오 작가는 방송작가(TV 프로그램 재방송)나 가요 작사가(노래방 등 사용료)처럼 2차 저작권(비디오 제작·방송사 판매)에 대한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유회장은 "제작가협회측과 작가 권익 개선을 위한 단체 협상을 진행 중"이라며 "외국처럼 시나리오 작가의 노조 결성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호 기자

지난해 '번지 점프를 하다'로 혜성처럼 나타난 시나리오 작가 고은님씨에겐 '창작 이사'란 별난 타이틀이 따라다닌다. 영화의 성공에 힘을 얻은 제작사가 그에게 이사 자격을 부여한 것이다. 그는 영화사 주식도 일부 넘겨받았다. 안정된 창작 기반을 확보한 고씨는 이제 소속사가 기획하는 시나리오를 직접 쓰거나 감수하는 데 전념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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