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일간 5002km 질주, 그에게 65세 나이는 숫자일 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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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권이주씨(가운데)가 25일(현지시간) 95일간의 미 대륙 횡단 마라톤을 마친 뒤 뉴욕 유엔본부 앞 골인 지점으로 들어서고 있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95일을 하루도 쉬지 않고 달려온 그는 골인 지점을 통과하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몸은 가볍게 떨고 있었다. 감정은 복받쳤다. 잠시 흐느낀 그는 일어서며 외쳤다. “내가 해냈다!”

미국 언론에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로 소개된 뉴욕마라톤클럽 권이주(65) 회장이 25일(현지시간) 미국 대륙 동서 횡단에 성공했다. 3월 23일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를 떠난 지 95일 만인 이날 미국 뉴욕 유엔본부 앞에 도착했다. 그동안 달린 거리는 5002㎞. 하루에 평균 53㎞를 주파했다. 아스팔트 도로뿐 아니라 비포장도로와 사막도 그의 도전을 막지 못했다. 그는 아시아인으로선 최고령 미국 대륙 동서 횡단 완주자가 됐다. 더욱이 중증 당뇨병을 앓았던 아마추어 마라토너가 동서 횡단에 성공한 건 극히 이례적이다.

이날 마지막 맨해튼 구간은 뉴욕시민을 대표해 존 리우 뉴욕시 감사원장이 함께 뛰었다. 리우 원장은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아시아인으론 처음 뉴욕시 ‘넘버 2’ 고위직에 오른 중국계 미국인이다. 리우 원장은 “당뇨병 환자였던 권이주씨가 3100마일에 달하는 미국 대륙 동서 횡단을 이뤄낸 건 기적”이라며 “그의 도전은 코리안 커뮤니티는 물론 미국 사회 전체에 영감과 희망을 줬다”고 말했다. 뉴욕 주재 김경근 총영사는 “6·25 60주년 기념일에 권씨가 세계 평화의 전당인 유엔본부에 골인한 건 뜻 깊다”고 축하했다.

권 회장이 처음 달리기를 시작한 건 51세 때인 1996년이다. 자고 일어나니 어금니가 쑥 빠졌다. 시력도 급격히 떨어졌다. 덜컥 겁이 난 그는 병원을 찾았다. 중증 당뇨병이었다. 먹고 사느라 몸을 돌보지 못한 탓에 1m62㎝ 키에 몸무게도 84㎏이나 됐다. “달리 치료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말에 그는 오기가 생겼다. “벌써 두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긴 내가 아닌가.” 한번은 1969년 베트남 전쟁에서였다. 정글 속에서 빗발치는 베트콩의 총탄 세례를 받고도 살아남았다. 1985년엔 칠레에서 대지진을 만났다. 마침 영화를 보고 있다가 급히 몸을 피한 직후 건물이 무너졌다.

그러나 막상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생각하니 막막했다. 그래서 무작정 군에서 배운 맨손체조를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뛰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온실 속 식물처럼 허약해진 폐와 다리는 비대해진 몸을 가누지 못했다. 100m도 못 가 주저앉았다. 약이 더 올랐다. 일주일 뒤엔 병원에서 지어준 약마저 끊어버렸다. 그렇게 4년을 버티자 놀랍게도 혈당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자신감이 생긴 그는 마라톤에 도전하기로 했다.

2000년 뉴욕마라톤에 첫 출전했지만 10㎞ 지점에서 길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응원 나온 딸 보기가 부끄러워 도망치듯 집으로 갔다.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봤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서두르지 말자.” 20주 동안 지옥의 훈련을 거친 뒤 그는 그해 11월 마침내 필라델피아 마라톤에서 첫 완주에 성공했다. 그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주변엔 함께 달리는 사람이 하나둘 늘었다. 그 인연이 자연스럽게 2004년 뉴욕마라톤클럽 창립으로 이어졌다. 그 뒤 10년 동안 권 회장은 마라톤 풀코스 101회 완주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100마일(160㎞)을 쉬지 않고 달리는 울트라 마라톤도 세 차례 완주했다.

지난해 서재필 박사 추모 뉴욕~필라델피아 240㎞ 마라톤 완주 뒤 그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벅찬 단어가 가슴에 와 닿았다. ‘분단된 내 조국.’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높이는 길은 없을까. 고민하던 그는 그동안 막연하게 꿈꿔왔던 미 대륙 동서 횡단을 떠올렸다. 100년 넘는 한국인의 미주 대륙 이민사에도 마라톤으로 동서 횡단에 도전한 사람은 없었다. 미국 사회에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사실도 각인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의 도전이 당뇨병으로 신음하는 환자에게 희망을 줄 거란 믿음도 생겼다.

그런데 막상 길을 나서려니 걸림돌이 한둘이 아니었다. 동서 횡단을 위한 마라톤 코스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길을 찾아 뛰어야 했다. 사막을 가로지르고 로키와 애팔래치아 산맥도 넘어야 했다. 정해진 숙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식사도 골칫거리였다. 레이스 도중 배탈이라도 나면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뜻을 세우니 길은 열렸다. 10차례 자동차로 대륙 횡단을 한 교민이 있다는 소식에 조언을 얻고자 찾아갔다가 뜻밖에 원군을 만났다. 뉴욕주 롱아일랜드에서 사업을 하는 헨리·제시카 차 부부였다. 권 회장의 설명을 들은 부부는 금세 의기투합했다. 선뜻 레저용 버스를 내주고 운전까지 자청하고 나섰다. 그 자리에서 숙소와 식당이 해결된 셈이었다.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장을 지낸 재미 사진작가 김종호씨는 전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겠다며 동행하기로 했다. 미주중앙일보도 권 회장의 도전을 후원하기로 했다.

우여곡절 끝에 권 회장과 ‘대륙 횡단 울트라 마라톤’ 운영위원회는 3월 23일 LA에서 장도에 올랐다. 첫 구간부터 만만치 않았다. 사막의 모래먼지가 코와 입을 파고 들어 숨을 쉬기 어려웠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지평선뿐인 사막을 혼자 달려가는 건 고독과의 싸움이었다. “내가 왜 뛰어야 하나.” 회의가 매 순간 발걸음을 잡아 끌었다.

사막을 겨우 벗어나자 이번엔 오르막길과의 사투가 시작됐다. 애리조나주에서 뉴멕시코주에 걸친 로키 산맥이 앞을 가로막았다. 오르막길만 16㎞씩 계속되는 구간도 있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2000m가 넘는 고지대에선 숨이 더 가빠졌다. “100m만 더 가자.”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수도 없이 자신을 채찍질했다. 정신력의 힘은 무서웠다. 고지대 오르막길에서 그는 하루 50㎞를 달렸다. 한 달 만인 4월 23일 1000마일을 넘어섰다. 마지막 고비는 동부로 접어드는 관문 애팔래치아 산맥이었다.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폭우,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짙은 안개가 지친 다리를 더 무겁게 했다.

산맥을 넘자 아내는 몸살이 났다. 90일 가까이 남편의 건강을 걱정하며 마음을 졸여왔던 탓이었다. 부부의 머리카락은 처음 출발했을 때보다 훨씬 색깔이 바래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밝았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말했다. “65세인 나도 해냈다. 뜻을 세운다면 이보다 더 한 일인들 못할 게 있겠는가.”

뉴욕=정경민 특파원 jkm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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