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입관없이 조명한 '청년 이승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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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는 최근 『젊은 날의 이승만-한성감옥생활(1899~1904)과 옥중잡기 연구』를 출간했다.

유교수는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료의 중요한 비고(?庫)라고 할 수 있는 이승만의 이화장(花莊) 문서를 정리·분석한 지 10여년 만에 결실을 본 것이다. 90년 이승만의 생애는 한국 근현대사의 압축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도 그의 공과를 조명하는 일조차도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기피돼 왔다.

실로 근현대정치사에서 우남(雩南)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국부(國父)'로부터 '독재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개화운동가·항일언론인·항일민족운동의 지도자·건국대통령·반공투사·국부 등으로 추앙받는가 하면, 그 반면에 친미주의자·친일파 비호자·국토분단의 주범·독재자로 규탄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평가를 넘어서는 포괄적 논의가 요청되는 시점이다.

1919년 기미운동 직후 수립된 임정이 당시 상하이(上海) 현지에 없었던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임한 사실은, 그 당시 그가 정적들을 제거하는 치열한 권력투쟁에서 의 승리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그의 그런 위상이 확립된 배경에 대해서는 우리 학계에서 그다지 명쾌한 설명이 나오지 못하고 있던 차에 유영익 교수의 『젊은날의 이승만』연구가 관련 자료 해제와 함께 출간돼 이 문제를 해명해 주고 있다. 유교수는 이 저서에서 조선조 말기 이미 이승만은 지명도가 높은 청년 지도자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승만은 1897년 배재학당 졸업 후 언론활동을 통해 그리고 독립협회·만민공동회 등 정치활동을 통해 청년지도자로 부상했으며, 1899년 1월 한성감옥 투옥 후에 위상이 더 높아졌다.

더욱이 유교수의 이번 연구는 이승만의 『옥중잡기』 등을 면밀히 분석하면서, 이승만이 5년7개월간 감옥생활을 하게 된 직접적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당시 고종을 폐하고 박영효 중심의 개혁정부를 수립하려던 쿠데타 계획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당시 20대의 열혈청년으로서의 그의 행위는 급진적인 경향을 보였던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 1백여년은 조국 광복을 위한 투쟁 반세기, 그리고 광복과 건국으로 이어지는 반세기로 이뤄진다. 이제는 균형감각을 갖고 차분히 정리해야 할 때가 왔다. 유교수의 이번 연구는 이런 정리의 단초를 열어준다.

이택휘

<서울교육대학교 총장·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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