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번 돈 한국에 다시 투자” … 日 본사에 조건 내걸고 CEO 수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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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호 24면

‘모테루오야지’의 감성경영이 꽃피다
방 대표는 ‘옷 잘 입는 남자’로 통한다. 인터뷰 날의 옷차림도 예사롭지 않았다. 스트라이프 재킷에 멋쟁이들의 상징이라는 갈색 구두를 신었다. 뒷모습만 보자면 인터뷰에 동석했던 30대 남자 대리보다 젊어 보였다. ‘모테루오야지(モテルオヤジ, 멋진 중년 남성을 뜻하는 일본어)’는 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연평균 50% 성장의 마법사 … 방일석 올림푸스한국 대표

방일석 올림푸스한국 대표에게 패션은 트렌드를 읽는 통로다. 그는 “패션을 통한 이미지는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힘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는 감성경영을 실천하는 대표적인 최고경영자(CEO)로 꼽힌다. 신인섭 기자

패션 감각은 하루아침에 완성된 게 아니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폼 나 보이려’ 교복을 줄여 입었다. 육군 장교로 근무할 때는 보급품 대신 직접 육군본부에 가서 군복을 맞춰 입었다. 88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엔지니어로 일할 때도 작업복을 몸에 맞춰 입었다. 그런 그를 동료들은 ‘미스터 반도체’라고 불렀다.

“흔히 중년 남성들이 ‘아내가 골라주는 대로 입는다’고 말하죠. 답답한 일이죠. 패션은 비즈니스 스타일을 나타내는 코드입니다. 마케팅은 항상 트렌드를 생각해야 하는데 정작 본인이 그 트렌드에 관심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패션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입니다. 패션을 통한 이미지는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힘을 갖습니다.”

앞서 가는 트렌드를 읽기 위해 방 대표는 패션쇼에도 가끔 참석한다. 디자이너들과 교류하고 스타일에 대한 조언도 받는다. 최근에는 패션에 관심이 많은 업계 최고경영자(CEO)들과 친분 있는 디자이너 10여 명이 모여 패션에 대해 품평하고 이를 통해 경영 능력을 키우는 ‘잰틀회’ 활동도 하고 있다.

패션을 통한 트렌드 읽기는 PEN의 감성 마케팅에 활용됐다. PEN을 소비자들이 카메라를 넘어 ‘패션’, 나아가 ‘문화’로 받아들이게 만든 것도 그가 고수한 감성경영의 결과다.

사실 하이브리드 카메라의 시작은 PEN이 아니다. 포화 상태에 이른 카메라 시장의 틈새를 하이브리드로 처음 노린 건 파나소닉이었다. 2008년 ‘루믹스G1’을 내놨다. 그러나 반응은 시들했다. ‘어중간한’ 카메라로 치부됐다.

PEN은 다르게 접근했다. PEN은 기술이 아니라 감성에 호소했다. PEN 이전 디지털 카메라는 단순 기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PEN이 나오면서 ‘스타일’이 더해졌다. ‘다르다’는 가치에 지갑을 여는 사용자들, 곧 ‘블랙칼라 워커(육체 노동을 주로 하는 블루칼라와 달리 안정된 사회적 위치의 전문직 종사자들)’ 계층의 눈에 PEN이 들어왔다. 사진작가 조선희, 패션 디자이너 장광호 등을 기용해 출시 한 달 전부터 입소문 마케팅을 벌였다. ‘페니아’도 대거 생겨났다. PEN에 열광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PENIa(페니아)’로 부른다. 패션브랜드 루이까또즈와 손잡고 PEN 전용 카메라백도 내놓았다. PEN은 기기를 넘어 라이프 스타일이 됐다. 아이폰 사용자들이 ‘아이폰 전도사’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페니아들도 PEN 전도에 앞장선다. 소비자들은 PEN에 대해 ‘좋다’를 넘어 ‘가지고 싶다’고 반응한다.

“PEN은 단순한 카메라 보디뿐 아니라 렌즈·액세서리·소비자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산업군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합니다. 아이폰이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새로운 생태계를 만든 것처럼요. 앞으로도 PEN 문화를 적극 지원할 겁니다. 팝아티스트·예술가 등을 초청해 포럼 및 콘테스트도 개최할 예정이고요. 소비자들이 만들어가는 브랜드, 소비자들이 키워가는 시장이 바로 PEN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방 대표의 전략은 거꾸로 일본에도 수출됐다. 루이까또즈와의 협업은 일본 본사에서 벤치마킹했다.

방 대표는 회사 설립 초기부터 감성경영을 실천했다. 대표적인 것이 전지현을 스타로 만든 TV 광고 ‘마이 스토리’ ‘올림푸스와 나만이 아는 이야기’다. 올림푸스가 국내 시장에 진출했던 2000년대 초만 해도 디지털 카메라는 생소한 물건이었다. 전체 판매량이 11만 대에 그쳤다. 필름 카메라에 대한 애정이 인간미 없는 ‘기계’ 디지털 카메라의 편리함을 압도했다. 경쟁사가 기술력을 강조할 때 방 대표는 감성으로 접근했다. 디지털 카메라에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는 방법을 택했다. 디지털 카메라로 ‘추억’을 만들고 저장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지현의 대학 생활 이야기로 전달했다.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는 전략이 들어맞았다. 디지털 카메라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올림푸스한국은 설립 1년 만에 업계 1위로 올라섰다.

최근 신축한 서울 강남 사옥 지하에 250석 규모의 클래식 전용 공연장을 만들고 ‘갤러리 펜’의 문을 연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계를 만드는 제조업체에서 벗어나 문화 콘텐트를 제공하는 문화 기업의 이미지를 강화하겠다는 전략이다.

감성경영의 핵심은 ‘공감’이다. 공감을 위해선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소비자를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직원들 간의 이해도 필수적이다. 그가 2004년 올림푸스이미징(올림푸스그룹의 디지털 카메라 부문 자회사)의 아시아중동 총괄사장을 겸임할 때다. 관리하는 직원만 2만2000명에 달했다. 문제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었다. 일을 추진할 때 내부의 반발을 돌리는 데 에너지의 대부분을 쏟았다. 서로를 이해 못 해서 생기는 일이었다. 2006년 올림푸스한국에 전념하기로 하면서 방 대표가 가장 신경 쓴 게 내부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때부터 직원들에게 매일 퇴근 전에 업무 보고를 e-메일로 하도록 했습니다. 매일 500통의 메일이 쌓이는 겁니다. 처음에는 직원들도 황당해 했죠. 저도 e-메일을 읽는 데만 많은 시간을 썼고요. 그런데 이렇게 하고 나니 부서 간 오해가 없어지고 일 처리가 빨라졌습니다. 임원들이 뭘 하고 있는지 이미 알기 때문에 보고를 하러 오면 5초 만에 결재가 끝납니다. 거래업체에서는 ‘올림푸스는 신기한 조직이다. 이 부서 사람한테 한 얘기를 저 부서 사람이 바로 알고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말하더군요. 올림푸스한국이 업계 최고의 생산성을 자랑하는 이유죠.”

로컬에서 글로벌을 꿈꾸다
“어느 회사에 들어가느냐보다 어떤 상사를 만나느냐가 훨씬 중요합니다. 누구에게나 잠재력은 있습니다. 좋은 상사를 만나면 잠재력을 발휘해 큰일을 이룰 수 있죠. 아니라면 그저 그렇게 끝나고요. 제가 인복이 있습니다. 첫 직장에서 제가 모시고 있던 상사들은 모두 사장이 되셨습니다.”

직장 생활의 성공 비결을 물었더니 돌아온 답이다. 방 대표는 속칭 ‘공돌이’다. 공대를 졸업한 후 들어간 첫 직장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생산라인이다. 공돌이 인생을 바꿔놓은 사람이 당시 방 대표 부서의 부장이었던 이상완 전 삼성전자 사장이다. 이 전 사장이 본사 영업 본부로 옮겨가면서 그를 데려갔다. 일본 지역전문가 1기를 거친 방 대표를 93년 일본 주재원으로 보낸 사람은 최지성 사장, 당시 반도체판매사업본부 메모리수출 담당 이사다.

상사들이 그를 알아본 건 그가 잠재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방 대표는 언제나 CEO의 마인드로 일했다. 그가 올림푸스한국의 대표가 된 것도 그 덕이다. 90년대만 해도 삼성전자란 회사도, 그가 팔아야 하는 낸드플래시 반도체도 생소한 물건이었다. 전화번호부를 펼쳐 들고 거래처를 공략했다. 그래서 뚫은 거래처가 올림푸스다.

“일본에서는 회사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맡고 있는 담당자가 누구냐가 더 중요합니다. 한 번은 삼성전자가 특허 분쟁에 휘말렸고 소송에서 패했습니다. 삼성전자 반도체를 쓰는 올림푸스에서 클레임을 제기할 수 있었죠.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결국 올림푸스가 삼성전자에 1원 한 푼 요구하지 않고 문제가 해결됐죠.”

방 대표는 그렇게 올림푸스에 신뢰를 심어줬다. 나중엔 삼성전자에서 만드는 낸드플래시의 30%를 올림푸스에서 사가게 됐다.

90년대 끝자락, 올림푸스 경영진 가운데 한 명이 한국 시장 진출을 고려 중이라며 방 대표에게 조언을 구했다. 방 대표는 주말에 100쪽에 달하는 한국 시장 자료를 만들어 건넸다. 2000년 1월, 올림푸스는 그에게 ‘한국 지사를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9개월여를 고민한 끝에 ‘삼성맨’으로서의 안락한 미래 대신 보장 없는 CEO의 길을 택했다. 그해 10월, 5명의 직원과 함께 올림푸스한국을 설립했다.

“CEO를 맡는 대신 조건을 걸었습니다. 인사·재무 등을 분리해 독립적으로 회사를 운영하겠다, 한국에서 번 돈은 한국에 다시 투자하겠다는 것이었죠.”

외국계 기업의 한국 법인으로서는 이례적이다. 보통은 직원 한 명을 뽑자고 해도 본사 허락을 맡아야 한다. 외국 기업이 한국에서 벌어들인 돈은 대부분 배당 형태로 본사에 흘러가지만 올림푸스한국은 한국서 번 돈을 한국에 투자한다.

투자를 통해 꿈꾸는 것은 한국법인의 글로벌화다. 강남 사옥 문을 열면서 방 대표가 내세운 ‘비전 2020’의 핵심이다. 91년 역사를 자랑하는 올림푸스 광학 기술에 한국의 강점인 정보기술(IT) 기술을 접목한 신사업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자회사 ‘올림푸스디지털네트워크코리아(ODNK)’의 이름을 ‘비첸’으로 바꿨다. 외국기업 현지법인이 본사 이름을 떼는 것은 이례적이다. 해외에 진출할 때 현지에 있는 올림푸스 법인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어서라는데 글로벌화를 적극 추진하겠다는 방 대표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비첸은 현재 국내 최대 온라인 인화 사이트 ‘미오디오’를 운영하고 고해상도를 요하는 제품의 디지털 전시기술을 주로 개발하고 있다.

“이미 5년 전 ‘1억불 수출탑’을 받았습니다. 일본 회사의 한국법인이지만 광학과 관련된 신규 사업을 개발해 본사를 능가하는 글로벌 기업이 될 겁니다. 사진 문화를 멀티소셜네트워크(Multi-Social Network) 환경으로 이어가는 등 모바일·소프트웨어 산업에서 신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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