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Global] 월드컵 16강 탈락 레블뢰 … 분열된 프랑스 국민 … 상처받는 톨레랑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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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월드컵 대표팀의 16강 탈락이 확정된 다음날인 23일 일간지 르몽드의 1면에 실린 제목이다. ‘레블뢰’는 파란색이라는 뜻으로 푸른색 유니폼을 즐겨 입는 프랑스팀의 별칭이다. 기사의 첫 문장은 “이제 끝났다”였다. 더 이상 추한 모습을 안 보게 돼 다행이라는 뉘앙스다.

프랑스는 우루과이와 비기고(0:0), 멕시코(0:2)와 개최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1:2)에 져 일찌감치 짐을 쌌다. 1998년 우승, 2006년 준우승의 월드컵 우등생이자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9위의 팀이 1무2패로 A조 꼴찌의 성적을 거둔 것이다. 화려한 기술 축구로 쌓은 ‘아트 사커’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무기력한 게임만 보여주다 결국 2002 한·일 월드컵 때처럼 16강 탈락의 쓴맛을 봤다.

프랑스 언론이 ‘재앙’이라고 표현한 것은 성적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항명, 선수 퇴출, 훈련 거부, 축구단장 사퇴, 주장 출전 제외 등으로 이어진 선수와 코칭스태프의 노골적인 내분이 더욱 문제였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까지 나섰지만 끝내 수습이 안 된 이 사태의 중심에는 6년 동안 팀을 맡아온 레몽 도메네크(58) 감독이 있었다.

도메네크 감독의 무능

레몽 도메네크

프랑스가 멕시코에 진 다음날 1998년 우승과 2006년 준우승을 이끈 프랑스 축구 영웅 지네딘 지단(38·레알 마드리드 고문)은 도메네크 감독을 향해 “그는 감독 자격이 없다”는 독설을 던졌다. 통솔력과 작전 구사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도메네크 감독의 능력에 대한 의심은 오래된 일이다. 2004년 유럽 챔피언십(UEFA Euro 2004)에서의 부진으로 자크 상티니 전임 감독이 경질돼 사령탑의 자리를 차지했을 때부터 논란은 시작됐다. 리옹 구단의 수비수 출신으로 프랑스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었지만 이렇다 할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6년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던 것은 2006 독일 월드컵 덕이었다. 스위스·한국과 잇따라 비긴 프랑스는 토고를 잡고 간신히 16강전에 올랐다. 이후 지단의 노장 투혼 덕에 스페인·브라질·포르투갈 등의 강적을 물리치고 결승에 올라 이탈리아와 접전을 벌인 끝에 승부차기에서 패했다.

도메네크 감독은 이후 몇 차례 퇴출 위기를 맞았다. 2008년 유럽 챔피언십에서 프랑스가 그루지야에 0:3, 이탈리아에 1:3으로 패하며 조별 예선에서 탈락하자 선수 기용과 작전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능력 있는 해외파 대신 무명의 국내파 기용을 고집하며 일부 선수의 제외 이유로 “(선수가 태어난 달의) 별자리에 문제가 있다”는 발언을 해 프랑스인들을 어리둥절케 했다. 감독 교체의 여론이 들끓었지만 월드컵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리가 보전됐다.

이번 월드컵의 지역예선에서도 천운이 따랐다. 프랑스는 아일랜드와의 경기에서 티에리 앙리의 팔에 맞은 공이 윌리암 갈라스 슛을 거쳐 골로 인정되며 기적적으로 남아공행 티켓을 얻었다. 명백한 오심이었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도메네크의 운은 거기까지였다. 이후 대표팀 선수들의 성매매 사건으로 한바탕 소동을 겪었고,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0:1로 패하는 이변까지 연출했다. 그의 자리는 곧 지롱댕 보르도 구단의 로랑 블랑 감독에게 넘겨진다.

배후에 지단?

지네딘 지단

도메네크 감독에게 쏟아진 비난의 핵심은 기라성 같은 선수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 16강에도 오르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슛의 달인’으로 통하는 바르셀로나의 앙리, 영국 첼시의 핵심 공격수 니콜라 아넬카, 독일 바이에른 뮌헨의 날개 프랑크 리베리, 영국 아스널의 베테랑 수비수 윌리암 갈라스,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파트리스 에브라 등 선수 개개인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다만 이들을 하나의 팀으로 엮을 구심점이 없을 뿐이다.

레퀴프는 도메네크 감독의 지도력 부재뿐 아니라 지단과 같은 맏형 구실을 하는 선수가 없는 것이 팀 약화의 주요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그가 없으면 앙리나 아넬카 같은 공격수의 발에 공이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단은 2006년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지만 프랑스 축구에 미치는 그의 힘은 아직도 상당하다. 일각에서는 이번 월드컵에서 선수들의 반란도 지단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지단이 아넬카·에브라 등 대표팀에서 함께 뛰어온 선수들을 부추겨 감독에게 반기를 들도록 했다는 것이다. 지단은 “멕시코와의 경기 전에 선수들을 만나 감독에게 전술 변경을 건의해 보라고 한 게 전부”라며 배후설을 부인했다. 그는 선수들이 집단훈련을 거부하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선수들을 비판했다. 프랑스 대표팀 선수들은 아넬카가 감독의 작전 지시에 대들다 욕을 해 팀에서 쫓겨나자 훈련을 거부했고, 이 일로 주장인 에브라는 남아공 전에서 제외됐다.

사르코지의 격노

자중지란 끝에 16강 문턱을 넘지 못한 프랑스팀의 감독과 선수들은 조만간 프랑스축구협회(FFF)의 조사를 받는다. 내분의 진상을 규명하라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일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선수들의 훈련 불참 소식에 화를 내며 체육부 장관에게 사태 수습을 명령했으나 감독과 선수들의 마찰은 그치지 않았다.

대통령의 개입으로 월드컵은 정치 이슈가 됐다. 야당인 사회당은 “사르코지 정부 이후에 확산된 이기주의, 개인주의, 배금주의가 이번 일의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가치를 경제적 성취로만 환산하는 풍토를 확산시켜 선수들이 국가보다는 개인의 이해를 먼저 챙겼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파 정치인 들은 대표 선수 대부분이 이민자 후손들로 구성돼 애국심이 약한 게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부 학자는 이런 주장이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FN) 앞에 고속도로를 깔아주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나와 다른 생각을 인정하는 프랑스의 가치, 톨레랑스(관용)가 상처받을 위험에 놓여 있는 것이다.

파리=이상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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