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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물들의'아이러니 삶'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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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포스트모던한 영화다. 세상의 질서와 합리성을 숭상하는 서구의 모더니즘에 반기를 들고 삶의 우연성과 부조리를 앞세웠던 포스트 모더니즘 사상을 스크린에 옮겨놓은 훌륭한 사례로 남을 법하다. '바톤 핑크'(1991년) '파고'(96년)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던 할리우드의 재간둥이 코언 형제가 지난 해 칸에서 세번째 감독상을 차지한 작품이다.

'복수는 나의 것'의 박찬욱 감독은 "인생이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일들의 집합체일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선의로 시작한 행동이 뜻밖의 결과를 낳는 게 삶의 아이러니라고 강조했다.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의 키워드도 바로 '아이러니'다.

박감독이 잔혹한 폭력신으로 운명의 가혹함을 묘사했다면 코언 형제는 나직한 목소리로 삶의 불합리성을 들춰낸다. 코언 형제(형 조엘은 감독, 동생 에단은 각본)는 원래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듯하다. 흑백의 차분한 화면을 뚫고 불쑥불쑥 솟아나오는 고급 유머가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경쾌하게 끌고간다.

1940년대 후반 미국의 한적한 시골 마을. 기계적인 일상에 지친 이발사 에드(빌리 밥 손튼)는 우연히 이발소를 찾은 손님의 꾐에 넘어가 드라이 클리닝 사업(당시로선 요즘의 정보통신 같은 벤처산업)에 투자할 돈을 마련하려고 아내 도리스(프랜시스 맥도먼드)와 불륜 관계에 있던 백화점 사장 데이브(제임스 갠돌피니)를 살해한다. 영화는 이후 살인범 추적이란 큰 틀 속에서 보통 사람, 이른바 중산층의 다양한 속성을 녹여낸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엉터리'들이다. 바람난 아내를 모른 척 하고 넘어가는 에드, 2차 대전에 참전한 적이 없으면서도 과거의 무용담을 떠벌이는 백화점 사장, 순진한 에드를 속여 넘겨 돈을 챙기는 사기꾼 사업가, 각각 살인죄로 몰린 도리스와 에드를 변론하는 달변의 변호사 등. 거짓말쟁이들이 모여 사는 것 같으면서도 큰 탈 없이 움직이는 세상사를 비웃는 듯하다.

코언 형제는 반전에 반전이 연속되는 치밀한 구성을 통해 모순투성이인 현대인의 삶을 자근자근 풍자하고 있다. 에드가 평소 연모했던 피아노 치는 소녀의 순박한 이미지를 영화 후반부에 1백80도 돌려놓는 '장난'도 서슴지 않는다.

영화 초반 에드는 "여기는 자유국가니까 (타인을) 훼방할 마음이 없다"고 말한다. 자기 일에만 충실하겠다는 심드렁한 발언이다. 전기 의자 사형대에 앉기 직전 그가 뱉은 말, "남들에게 상처를 준 건 미안하지만 후회는 없다"의 분위기도 엇비슷하다. 한 개인이 추스르기엔 세상이 너무 방대하다는 뜻일까.

코언 형제에겐 법정도 '빅 쇼'로 추락한다. 사건의 본말을 캐기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역설하며 배심원의 판단을 혼란케 하는 요설의 변호사가 영화의 메시지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선악 구분 같은 이분법적 발상, 뚜렷한 인과관계 같은 자연과학적 법칙에 던지는 그들의 '강력 펀치'가 발칙하면서도 재치있다.

우리도 에드의 고백처럼 '유령인생'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장면 장면을 곱씹는 재미가 만만찮다. 원제 The Man who wasn't there. 18세 이상 관람가. 3일 하이퍼텍 나다 개봉.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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