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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중앙 시조 대상] 중앙 신인 문학상 <시조부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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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문상(問喪)

정 선 주

은행나무 그 아래 낡은 구두 한 켤레

행길을 뒤로 한 채 돌아선 늙은 마음

마을을 지나 온 저녁비가 소슬히 덮고 있다.

살아서 걸어 온 길 죄다 끊어 버리고

뿌리 위에 기대고 누운 편안한 저 침묵

성소(聖所)에 발길 옮기듯 생각이 깊어 있다.

하늘로만 솟구치던 노오란 은행잎도

젖어 있는 돌담길을 조등처럼 밝힌다

상주도 문상객도 없는 한 생의 뒷모습.

바람이 불 때마다 지워지는 몸을 끌고

눅눅한 신발들은 버스를 타고 떠나지만

수묵의 저문 가을 속, 들국 향기 환하다.

*** 수상자 정선주씨

"시조 짝사랑에 울기도 많이 울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잘못 걸려온 전화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중앙시조백일장 연말장원(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을 당당하게 통과해 어엿한 문인이 된 정선주씨는 당선사실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을 때의 기쁨이 여전히 생생한 듯했다. 정씨는 "가족과 그동안 관심을 가져준 주위 분들께 당선 소식을 전하며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월 시조백일장에서 장원에 뽑혀 연말장원에 응모했었다.

정씨는 "1997년 외환위기 때 남편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며 시와 종교를 함께 만났다"고 시와의 인연을 소개했다. 시 때문에 울기도 했고, 시 쓰기 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시 때문에 아픈 날들이 이어졌다. 시에 대한 짝사랑이 극도에 달하자 말 그대로 갈급해서 시집들을 찾아 읽었고 본격적으로 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 기회가 닿으면 평가도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의 마음 안에 글쓰기 혹은 어렴풋하게나마 문학에 대한 관심이 자리잡은 것은 훨씬 오래 전의 일이다. 정씨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일,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못했던 일 등을 겪으며 책읽기와 일기 쓰기에 한참을 매달렸었다"고 밝혔다.

시조로 먼저 등단을 하게 됐지만 정씨는 자유시도 같이 쓰고 있다. 그때그때 감성에 따라 시조가 써질 때도 있고 자유시가 써질 때도 있단다. 정씨는 "아직 시조가 뭔지 시가 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시조는 언어를 좀 더 다듬고 아껴써야 하는 것 같다. 또 시조 쓰는 게 시 쓰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정씨는 "좋은 시를 생명처럼 여기는 아름다운 시인이 되겠다"는 1월 시조백일장 장원 당선 때의 다짐을 되풀이했다.

*** 심사평

생의 쓸쓸함과 희망이 뚝뚝

응모자들이 월 단위로 치르는 지상백일장에서 엄선된 경쟁자들이니 만큼 연말결선이 어느 신춘문예의 경쟁보다 치열함은 말할 것도 없다.

최종 당선자는 중앙신인문학상 시조부문 수상자로서 영예의 신인이 된다. 총 스물아홉 분이 보내 온 252편을 놓고 장시간 치밀하고 엄정한 심사 끝에 정선주 씨의 '문상'을 당선작으로 올렸다.

예년에 비해 전반적 수준은 향상되었으나 괄목할 만한 작품이 없는 아쉬움이 있었다.

1차 심사결과 정선주.임채성.이태순.정상혁.김종훈.한석산.윤경희.권성미씨가 높은 평점을 받았으나, 소재와 접근방식이 지나치게 낯익거나 부적절한 시어로써 신선미를 잃고 있었다.

시조는 조화와 균형, 응축과 절제미를 지닌 정형시로서, 특히 종장에서 시조율격의 미학적 원리를 잘 보여주어야 한다. 종장 첫구의 율격에 무감해서는 시조의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없다. 이 점은 시조백일장에 관심을 가진 모든 분들이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

'문상'은 지상으로 드러난 은행나무 뿌리 위에 놓인 망자의 낡은 구두가 저녁비에 젖고 있는 데서 모티프를 얻고 있다. 화자는 망자와 문상객들의 신발을 통해 "성소에 발길 옮기"는 수사처럼 "깊"은 "생각"으로 우리 삶의 한 단면을 "소슬"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 풍경은 "들국 향기" "환하"게 흩어둠으로 해서 "수묵의 저문 가을 속"으로 표상한 죽음과 쓸쓸함의 정조로 함몰하지 않는다.

심사위원:김영재.박기섭.박시교.유재영.이우걸.홍성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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