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후보와 YS의 만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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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김영삼(YS) 전 대통령을 찾은 장면은 어색하다. 후보가 경선 과정에서 이인제 후보를 비난할 때면 3당합당을 고정 메뉴처럼 꺼내 "반(反) 역사·반 민주 행위에 합류했다"고 몰아세웠기 때문이다. 3당합당을 주도한 YS에 대해선 선거 때면 "부산의 자존심을 팔아먹은 변절자, 식견이 모자란다"며 험악하게 성토했던 그였다.

그런데 사진기자들을 위해 후보가 세 차례나 취해준 YS에게 절하는 포즈는 "정치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정치판의 현실을 실감케 한다. 원칙과 소신을 자신의 이력인 양 자랑했던 후보도 정치적 실리·이윤 앞에선 별 수 없구나 하는 인상을 국민에게 심어 준 모습이다.

무엇보다 6·13 지방선거 때 부산에 내놓을 후보를 YS의 '하명(下命)'으로 선정하려는 듯한 자세는 노풍(風)의 정체를 의심케 한다. 노풍의 위력은 정치의 신선한 변화를 기대하는 민심에 의해 형성됐다. 그런데 부산시장 후보에 YS 추천 인사를 내세우겠다는 것은 새 정치에 대한 기대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YS의 영향력이 어떠한지는 모르지만 낡은 지역정서를 부추겨 일어서는 게 개혁연합이라면 그 실체가 의심스럽다.

이는 3金식 제왕적 총재 시대의 밀실 공천에 의존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고 국민 경선의 정신을 훼손하는 태도다. 그 때문에 그가 YS와의 만남에서 내세웠던 민주 대연합론과 동서 통합론이 결국 호남과 PK(부산·경남)를 묶는 '노무현식 지역구도 전략'으로 드러나는 셈이다.

그의 이런 태도에는 '선거승리를 위해선 어떤 전략을 구사해도 나의 지지는 변하지 않을 것'이란 자신감이 깔린 듯하다. 그 때문에 국민에겐 오만으로 비칠 가능성도 있다. 지역주의 정치를 단절하겠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지역주의에 손을 내미는 듯한 행태에는 여론의 비판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선주자로서 후보의 움직임이 줄타기 정치로 비춰지는 것은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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