빕스 삼성점 이시형 주방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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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잠깐만요, 지금 그대로 떠나기 전 그대 모습 제 눈에 담을래요…♪♬"

이시형(30·사진)씨가 최근 작사·작곡한 발라드풍 가요 '떠나기 전'의 한 소절이다. 이씨는 이 곡을 비롯해 10여곡의 가요를 완성해 놨고 내년쯤에는 기성 가수에게 곡을 줘 작곡가로 정식 데뷔할 계획이다.피아노·기타를 다루는 솜씨도 수준급이다. 이만하면 작곡가로서 기본은 갖췄다.

하지만 이씨의 직업은 요리사다. 그것도 제일제당 계열의 CJ푸드빌이 운영하는 스테이크 전문 패밀리 레스토랑 빕스 삼성점의 주방장으로 일하며 20여명의 요리사를 진두 지휘하니 영향력도 꽤 있는 편이다. 그러니 요리사가 직업이고 작곡은 부업인 셈이다.

직업의 특수성 때문에 종일 서서 근무하다 오후 11시쯤 귀가하면 몸은 녹초가 되지만 이씨는 일주일에 평균 3~4회씩 작곡 연습을 한다. 그런 날이면 새벽 서너시가 돼서야 잠을 청한다."너무 피곤해 선잠이 들었다가도 '아차'하는 생각이 들며 잠이 확 달아나 버릴 때가 많아요. 그럴 때면 밤새 건반을 두드리죠."

이씨가 곡을 쓰는 데 이처럼 조바심을 내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1996년 군 제대 후 부산대 교육학과 2학년으로 복학한 그는 그해 겨울 학업 포기를 결심한다. 어린 시절부터 가꿔왔던 음악에 대한 꿈을 더 늦기 전에 실현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마침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친구가 작곡학원의 강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와 이씨의 결심을 부추겼다.

이듬해 3월 이씨는 매형이 마련해 준 작곡학원 3개월 수강료 1백만원과 생활비 10만원을 들고 상경했다. 그러나 생활은 곧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편의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지만 학원비를 충당하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1년도 안돼 학원 수강마저 포기하고 직업 전선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꿈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어요. 먼저 생활이 안정돼야만 작곡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공사장 노동·술집 웨이터 등 직업을 가리지 않고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빕스 주방의 요리사 보조로 일하게 됐고 2000년 3월엔 제일제당 공채시험을 통해 정식 직원이 됐다. 열심히 모은 돈으로 지난해엔 5백여만원짜리 건반도 구입했다.

같이 학원을 다녔던 친구가 가수 양진석의 곡 '천년의 사랑'으로 데뷔해 활발한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부럽기 그지없지만 이씨는 조금 더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아직 작곡 수준이 설익었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이 너무 하고 싶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교까지 그만뒀는데 대충 할 수 있나요."

요즘 리듬 앤드 블루스 계열의 노래를 만들고 있는 '작곡하는 요리사'는 스테이크를 구우면서도 지난 밤 떠올랐던 멜로디를 흥얼거려 본다.

글=김준현, 사진=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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