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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디지털 탐정이 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0면

'탐정'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버버리깃을 세우고 중절모를 쓴 중년 남자가 담배 한 모금을 빨아 허공으로 연기를 날려보낸 뒤 예리한 눈빛을 번득거리며 뭔가를 찾은 듯 어디론가 황급히 몸을 옮기는….

하지만 21세기형 탐정은 이런 '멋'하고는 거리가 멀다. 요즘처럼 비밀이 생명인 시절에 탐정의 외모나 행동이 튀었다가는 일을 그르치기 쉽다. 실제 탐정을 꿈꾸는 예비인들을 만나 얘기를 나눠보니 탐정에 대한 아련한 선입견은 여지없이 깨진다. 바야흐로 살인·도난 사건을 추적하는 셜록 홈스형 탐정보다는 정보 싸움을 벌이는 '사이버 탐정' '경제 탐정'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탐정들이다.

#1. 셜록 홈스의 전설을 넘어서려는 예비 탐정들.

미궁에 빠진 살인 사건을 한번 해결해 보는 게 평생 소원이라는 이준우(38·사업)씨는 셜록 홈스의 영향을 받은 '순수파' 예비 탐정이다.

"어릴 적 불이나 싸움을 구경하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는 게 취미였다"는 그는 대학 졸업 후 경찰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그냥 "평범하게 살라"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살인 사건 수사'의 꿈을 접어야 했다. 문득 불혹에 가까운 나이에 이르러 "하고 싶은 것을 해봐야지 않겠나" 싶어 사설 탐정이 되겠다고 나섰다.

지난해 한국PI(Private Investigator:민간조사원)협회에서 PI 즉 사설 탐정을 양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원서를 냈다. 교육 과정을 거의 이수한 그는 "아예 직업을 바꿔버릴까"하는 고민에 빠져 있다.

친구와 대화하거나 전화 통화를 할 때도 볼펜처럼 생긴 디지털 녹음기의 버튼을 눌러 놓는 버릇이 있는 손일남(39·신협중앙회 공제사업부 과장)씨. 찬찬한 말투부터가 탐정 냄새를 물씬 풍긴다.

한국PI협회가 주관하고 한국능률협회가 후원하는 3기 민간조사원 교육 과정(토·일 8주 강의)을 마친 33명의 예비 탐정들은 이제 PI자격검증 시험을 거쳐 정식 PI로 탄생하게 된다. PI협회는 1~2기 80여명의 사설 탐정을 배출한 국내 유일의 교육 기관이다.

어릴 적 추리 소설을 읽었을 때의 감동을 그대로 안고 탐정을 꿈꾸는 이에서부터 직업을 얻기 위한 현실적 필요에 의해 모인 사람까지 교육생들의 사연은 가지가지다.

나이는 20~40대로 다양하고 직업도 대기업의 부정·부조리 조사팀 직원, 전·현직 경찰, 군 수사관, 대학생 등 가지각색이다.

#2. 요즘 탐정이란 게…

운전하면서 다른 차의 번호판을 3초 내에 외워 3분 후 생각해내는 기억력 훈련, 백 미러나 사이드 미러에 비치는 장면들을 비디오 카메라에 담아내는 식별 기술 훈련 등. 이런 것들은 탐정이 되기 위한 일상 훈련에 지나지 않는다.

실탄 사격과 지문감식 훈련은 물론 인터넷 해킹에 대한 방어 및 공격을 위한 산업 정보 수집론, 최근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보험 범죄에 대비하는 보험범죄 개론, 유전자 분석의 개념을 익히는 법의학 등이 교육 과정의 주요 과목들이다.

유우종(38) 한국PI협회 이사장은 "익혀야 할 분야가 방대한 만큼 깊이보다는 사안을 읽어내는 안목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둔다"고 말했다.

요즘 탐정이 활용하는 조사 도구들도 진공관형에서 펜티엄형으로 많이 달라졌다. 인터넷 사용은 기본이고 영화 '미션 임파서블'에서 나왔던 초소형 컬러 카메라가 달린 비디오 안경, 남자 목소리를 여자 목소리로 들리게 하는 전화 목소리 변조기 그리고 인공위성 자동위치측정 추적 시스템까지 동원한다.

#3. 이 땅에서 사설 탐정 하기

첨단 기기의 도움을 받는 탐정들이긴 해도 기본을 무시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법.

그래서 '햄버거와 샌드위치 먹는 습관을 들여라' '가방 속에 소변통을 항상 넣고 다녀라' '흔적이 남으니 담배는 끊어라'는 등의 고전적 원칙이 강조된다. 몰래 카메라 촬영이나 도청 같은 손쉬운 방법이 있긴 하지만 사설 탐정에겐 그림의 떡이다. 법이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형사는 용의자를 발견해 그냥 잡으면 되지만, 탐정은 결정적인 단서를 필름에 담을 때까지 용의자를 계속 쫓아야 한다.

당연히 예비 탐정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사설 탐정 제도를 인정하는 국내법의 제정이다. 현재 이들은 PI자격증을 따고도 개인 탐정소를 차릴 수 없어 대부분 변호사 업무를 위임받거나 대행해주는 데 그치고 있다.

"뭐 곧 개선되겠지요. 오히려 미개척 분야를 새로 일궈나가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해야죠. 비정부기구(NGO)가 요즘 뜨잖아요. 아마 '경찰 NGO'(사설 탐정)도 곧 뜰 겁니다." 인터뷰 말미 한 교육생이 던진 말이다.

신용호 기자

실탄사격·유전자 분석·

인터넷 해킹 방어법까지…

8주간의 훈련을 통해

21세기의 탐정 그들은

정보 전쟁을 벌이는

'사이버 전사'로 태어난다.

목소리 변조기에 비디오 안경,

인공위성 추적 시스템까지

장비는 첨단이지만

규제가 많은 '법'은

이들이 넘지 못할 커다란

걸림돌이다.

"미개척 분야를 일구는 게 보람이죠. 언젠가 뜨지 않겠어요 ? " 투지가 두 눈에서 번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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