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싱싱한 사유를 어떤 '학문 그릇'에 담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생명'을 주제로 한 소장학자들의 글을 묶은 신간 『생명에 관한 아홉 가지 에세이』(민음사, 1만원)는 오늘날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글쓰기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에세이'란 말이 신변잡기와 얼마나 혼동돼 쓰이고 있는가, 또 사유와 지식을 담는 효과적인 새 그릇으로 이른바 논문과 또 다른 글쓰기 방식은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책에 실린 글들은 교수신문이 창간 10주년을 앞두고 지난 1년간 진행한 제1회 '학술에세이' 공모전 수상작들이다. 두 편의 최우수작 중 '생명-중(中)과 소통'을 쓴 서울대 강사 박재현(불교철학)씨, 그리고 이 행사의 기획자였던 교수신문의 최익현 편집국장은 아카데미즘과 주관적 사유의 접점이라 할 수 있는 '학술에세이'분야의 개척에 젊은 지식인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사회=지난해 1월 교수신문이 학술에세이 공모를 시작하면서 게재했던 유종호 교수의 글이 인상깊었다. "우리의 경우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본격적인 에세이가 참으로 희귀하다. 그것은 체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개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억압하는 지적 풍토와 연관된다. 천박한 날림글이 횡행하는 우리 처지에선 에세이가 각별히 육성할 가치가 있는 홀대된 분야라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는 그 말씀에 공감했다.

▶최익현=이 행사 기획은 책 서문에 밝혔듯이 '삶과 세계에 대한 지적 명상'이라는 에세이 본래의 의미를 살려, 우리 시대의 과제에 대한 지식인들의 독창적 사유를 이끌어내자는 취지다. 각주들 뒤에 몸을 숨긴 기존의 논문식 글쓰기와는 다른, 그리고 학문간의 경계도 자유로이 넘나드는 '살아 펄떡이는'글들을 기대했다.

▶사회=수준은 만족할 만했나.

▶최익현=이름만 대면 알 만한 교수·연구원에서부터 주부·종교인에 이르기까지 60명이 응모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딱 "이 작품이다"라고 할 만한 건 없어 대상을 뽑지 않았다. 대신 또 다른 최우수작이었던 한양대 이도흠 교수의 '생태 이론과 화쟁 사상의 종합'에서부터 가작이었던 유호정씨의 '생명과 물질 그리고 의식'에 이르기까지 수상작들은 타이틀과 상관없이 읽어봄직하다고 자신있게 권한다.

▶사회=박재현씨 글도 "동양사상의 접목에는 서툴렀지만 임신이라는 생명 체험으로써 제시된 문제제기가 압권이었다"는 평을 받았는데.

▶박재현=논거가 될 만한 인용을 최소화하려다 그렇게 됐다. 논문을 쓰라고 했다면 그런 지적은 받지 않았을 자신이 있다(웃음).'생명'이란 추상적인 주제를 살갑게 끌어들이면서 일기 같은 개인적인 글로 흐르지 않게 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사회=수필과 에세이의 가장 큰 차이는.

▶박재현=간단하다. 그것은 통찰이다. 즉물적 사실들에 대해 감상이나 사실 나열로 그치는가, 그것들을 객관화시켜 지적 통찰의 대상으로 삼는가에서 경계가 생긴다고 본다. 어쩌면 내 글에서 임신을 소재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남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몸으로 직접 경험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객관화가 가능했다.

▶사회=혹시 글을 쓸 때 부인이 임신 중이었나?사실 남성이 그런 식으로 글을 풀어나갔다는 게 신선했다.

▶박재현=(겸연쩍어하며)그렇다. 곧 둘째 아이가 태어난다. 그래서 아내는 심사위원 중에 여성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내 글이 신선하다는 평가는 내리지 않았을 거라고 놀린다.(웃음)

▶최익현=그렇지 않아도 심사위원들의 전공이나 관심 분야에 따라 작품에 대한 선호도 편차가 매우 커서 수상작 선정에 애를 먹었는데 심사위원 중 여성이 없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올해부턴 심사위원에 꼭 여성이 포함되도록 할 계획이다.

▶사회=어쨌든 '생명'을 첫 주제로 택한 것도 여러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최익현=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계의 위기와 배아 복제 허용 등 생명공학의 질주를 볼 때 우리 지식인들이 가장 고민하고 성찰해야 할 문제다. 또 다양한 학제간 접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응모자들을 전공별로 분석해보니 자연과학계열은 두 명의 교수뿐이었다.

▶박재현=기초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겐 2백자 원고지 1백장의 글쓰기가 여러 모로 힘겨웠을 것이다.

▶최익현=우리 교육의 문제다. 그나마 젊은 응모자들의 글에서 많은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 행사를 계속 치르다보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믿는다.

사회·정리=김정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