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로 변한'다정했던 이웃' "한국도 보스니아가 될 수 있다"여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6면

10년 전의 보스니아 내전을 훑은 르포물 『네 이웃을 사랑하라』(원제 Love Thy Neighbor)는 참혹한 기록이다. 발칸반도 '인종청소'의 구체적 모습에 현미경을 들이댔기 때문에 읽는 내내 우리의 가슴은 미어진다. 과장이 아니다. 저술 의도 역시 그렇다."이 책은 야수에 관한 보고서다. 야수란 모든 사람, 그리고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악한 정신을 말한다"(4백4쪽 '에필로그')

출간 직후 LA 타임스 선정 논픽션상을 받았던 이 보고서는 그럼에도 두루 읽혀져야 한다. 사망자 27만명, 난민 2백만명을 발생시킨 내전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재자 밀로셰비치에 대한 유엔의 전범 재판이 아직도 진행 중이고, 내전 학살극을 막지 못한 도덕적 책임을 스스로에게 물어 이웃 국가 네덜란드 내각이 총사퇴를 결정한 게 불과 보름 전 아닌가? 특히 이 책은 '위험사회' 한국에 대한 경고음으로 읽혀야 한다.

"사회가 지금 안정돼 있다 해서 항상 그러리라는 법은 없다. 이 사회에는 선동가들에 의해 분열될 수 있는 수많은 깊은 (민족주의·지역감정 등의)틈새가 있다. 거기 어딘가에 야수가 숨어 있다. 내 자신이 '워싱턴 포스트 기자로 3년간 한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보스니아와 한국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유사점들을 찾을 수 있다. 어떻게 그토록 가깝던 이웃들이 그렇게 쉽사리 또 광폭하게 갈라질 수 있는가? 보스니아가 던진 이 질문은 한국에도 중요하다."(저자의 글 '한국독자들에게'와 4백11쪽 요약)

책의 시작은 1992년 5월 보스니아 내전 한달 뒤 실내경기장에 차려진 난민수용소의 묘사다. 샤워 한번 못한 채 집단수용된 수백명 무슬람계 사람이 풍기는 코를 찌르는 악취에 저자는 질겁한다. 크로아티아의 달마아타. 이 지역은 본래 환상적인 항구도시였다. 놀라운 것은 이들 난민들은 불과 한달여전 깔끔한 차림의 의사·변호사로 살던 사람들이자, 세르비아계와는 이웃 사이였다는 점이다.

"이들 난민은 친구 사이로 세르비아 사람들에게 살육되거나 내쫓겼다. 바로 전 가을만해도 서로 도와가며 추수를 했던 사람들이었다. 사춘기 시절 모험을 나누고, 인구의 25%가 종교 차이에도 통혼(通婚) 했던 이들이 갑자기 살인마와 난민으로 돌변했다."(20쪽) "대가족처럼 살았던" 세르비아계는 무슬림 이웃 사냥에 나서 심지어 무슬림 사원 정문에 사람을 못을 박아 죽이기도 했다. 저자의 비통에 찬 질문은 이렇다.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어느날 갑자기 이웃에 대고, 그것도 모자라 강간까지 할 수 있을까. 옛 유고는 미국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프리카도 아니었다. 인종청소를 자행한 많은 이들은 정장차림으로 출근하고 거실에는 소니TV를 갖고 있으며, 시를 읽고 스키 휴가를 즐기던 사람들이었다."

글에서 암시되듯 이 책은 전쟁기록에 대한 시간대별 추적이나 객관적 시간표 작성이 아니다. 그걸 넘어 사람 안에 들어 있는 수성(獸性)에 대한 비통한 고발이다. 서술은 그런 살육극을 막지 못한 미국 행정부의 무능과 이기주의, 겉으로 멀쩡해보이는 거짓말쟁이 밀로셰비치의 인터뷰 등으로 이어지는데, 고뇌에 찬 저자의 모습이 읽는 내내 어른거린다. 20세기 후반 유럽사회 복판에서 벌어진 보스니아 내전기록이 과연 남의 일로 생각되지 않는다.

조우석 기자

Note

앞서 '위험사회 한국'에 대한 지적이 덜 실감 나신다고? 그렇다면 저자 피터 마쓰와 한국 사이의 인연을 상기시키려 한다. 그는 80년대 후반 한국 근무시 "한국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고 고발한 그 주인공이다. 서울 올림픽 직후 흥청대던 한국에 대한 경고 이후 우리는 IMF를 맞았다. 또 책에 노출되는, 상상을 뛰어넘는 잔혹행위는 도저히 옮길 수 없어 생략했다. 다만 그것이 2차대전 아우슈비츠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것 만을 밝혀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